자동차 시승기

20세기 WRC의 전설, 란치아 델타 HF 16v 인테그랄레 에볼루치오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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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 설레던 첫사랑을 오랜 시간이 지나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는가? 대개 세월의 풍파에 변해버린 모습에 실망하기 마련이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분명 있다. 이번에 만난 란치아 델타 HF 16v 인테그랄레 에볼루치오네 2가 바로 그런 경우. 그동안 자동차 시장은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지만, 이 차는 그 시절을 함께 추억하기에 충분할 만큼 매력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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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 찔찔 흘리던 어린 시절 오락실에는 ‘세가 랠리’라는 자동차 게임이 있었다. 등장 차종은 토요타 셀리카 GT-4와 란치아 델타 HF 16v 인테그랄레가 전부였지만, 이 둘은 모두 당시 WRC에서 치열한 경쟁을 펼치던 차였다. 인터넷도 없고 모터스포츠 중계를 보는 일도 흔하지 않던 시절, 이 두 차는 아이들을 오락실로 불러냈다. 광활한 대지와 눈 덮인 산악도로, 그리고 흙먼지 가득한 평원을 지나서야 이 차들의 앞모습을 볼 수 있었다. 게임이 끝날 때까지 주구장창 뒷모습만 보여주던 차의 앞모습을 봤을 때의 희열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짜릿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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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C 그룹 A를 휩쓴 주인공

필자가 란치아 델타 HF 16v 인테그랄레 에볼루치오네2(이하 에보2)를 실제로 만난 건 그로부터 20년이 훌쩍 지나서였다. 지금의 자동차들은 당시 에보2가 데뷔했던 시절에 비해 훌쩍 커졌다. 순수함 대신 상품성이 자동차를 나타내는 지표가 되었고 ‘오버 엔지니어링’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성능을 논한다는 게 소모적으로 비춰지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21세기에 20세기를 대표했던 랠리카를 만난다는 것은 마치 기억 속에 고이 간직한 첫사랑을 만나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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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 기기와 전자장비로 가득한 차에 길들여진 필자가 과연 이 차를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런 걱정은 에보2를 마주하자마자 순식간에 사라졌다. 외모에서부터 탄탄한 분위기를 자랑하고 있었기 때문. 직선으로 딱딱 떨어지는 패널들과 육감적으로 다듬은 와이드 펜더, 그리고 깎아내린 듯 급격하게 떨어지는 트렁크 라인까지 90년대를 풍미했던 랠리카의 로드 버전이 내뿜는 포스는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큼직한 구멍으로 냉각 효율을 높인 앞모습이나 4개의 원형 헤드라이트에는 고전미가 가득하다. 에보2의 인상은 처음부터 끝까지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강인함으로 똘똘 뭉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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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보2는 란치아가 WRC 그룹B 폐지 이후 신설된 그룹A에 출전시키기 위해 제작한 호몰로게이션 모델이다. 1990년대의 호몰로게이션 모델은 요즘과 다르게 출력만 조금 낮을 뿐 실제 경주차와 80% 이상 같은 구성이었다. 더군다나 WRC 역사와 맥을 함께 해온 에보2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풀비아, 스트라토스, 랠리 037, 델타 S4의 혈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모델. WRC에서의 성적은 1987년부터 1992년까지 6년 연속 매뉴팩처러즈 챔피언십을 차지했고, 이 중 네 번은(1987, 1988, 1989, 1991년) 드라이버즈 챔피언십을 함께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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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보2는 싱글 빅터빈 구성의 터보 엔진과 토센 사륜구동 시스템, 그리고 마그네티 마넬리에서 다듬은 전자제어 시스템 등 경주차에 동원된 당대 최고의 기술력을 그대로 머금고 있다. 광기의 시대라 불렸던 그룹B의 폐지 원인을 제공한 란치아가 300마력으로 출력이 제한되는 그룹A를 재패하기 위해 쏟아낸 각종 기술의 집약체라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른 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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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버전을 포함해 2,500대 가량 생산된 델타 에보 시리즈는 1984년에 등장한 델타 HF를 필두로 1994년의 에보2까지 이어진다. 옵션에 따라 세부 모델이 다양한 에보 시리즈는 메인터넌스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희소성이 높아 지금도 컬렉터들에게 인기 모델로 꼽힌다. 시승차는 에보 시리즈의 마지막 버전인 1994년식 에보2이며 레카로 시트, 모모 스티어링 휠, 스피드라인 휠을 갖췄다. 참고로 국내에 반입된 에보2는 딱 2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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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내에는 기계적인 느낌이 가득하다. 속도계, 타코미터를 비롯해 유압, 유온, 부스트, 전압 등 계기판 안에 아날로그 미터가 빼곡히 들어차 있다. 마치 비행기의 콕핏을 보는 듯한 느낌이랄까. 각 단 사이의 거리가 꽤 짧은 변속레버도 작동 질감이 아주 스포티하다.

남성미 가득한 싱글 빅터빈 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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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동을 걸면 특유의 4기통 터보 엔진 사운드가 으르렁댄다. 옥탄가가 높은 휘발유에 불을 당길 준비를 마쳤다는 신호다. 타코미터의 레드존은 6,200rpm부터 시작된다. 당시 WRC 경주차들이 약 7,000rpm까지 사용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디튠에도 상당히 공을 들였다고 할 수 있다. 최고출력 210마력은 지금 기준으로는 별 것 아니지만, 90년대 초반 국산 준중형~중형차들의 최고출력이 100마력 남짓이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제원상 0→시속 100km 가속 시간은 약 5.7초로, 요즘의 고성능 차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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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속 페달의 반응은 빠르다. 하지만 기어비는 생각보다 긴 편. 시내 주행에서는 웬만해서 2,500rpm을 넘길 일이 없다. 독일차에 비해서는 조금 부드러운 편이지만, 노면의 흐름은 빠짐없이 잡아낸다. 1.2바까지 표시된 부스트 게이지는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과급 이전 상황에서도 충분히 민첩하다. 싱글 빅터빈 구성에 긴 기어비 때문에 터보랙이 심한 편이지만, 차체가 가볍기 때문에 경쾌한 느낌으로 와닿는다. 델타 자체가 패밀리카로 설계된 만큼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시내 구간에서도 불편함이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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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스트 게이지의 바늘은 3,000rpm을 살짝 넘기면서부터 꼼지락대기 시작한다. 과급 이전에는 그저 편안하고 잘 움직이는 느낌만 가득했지만 부스트가 뜨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차의 움직임이 변한다. 터보랙을 거의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정밀해진 최신 터보 엔진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부스트가 뜨기 시작하면 터보차저 특유의 사운드가 들려오고, 가속 페달에서 발을 떼면 곧장 바이패스 밸브가 열리며 재가속 준비에 들어간다. 엔진은 약 6,200rpm까지 회전하는데, 토크밴드가 워낙 두툼해 차를 꾸준하게 밀어낸다. 확실히 효율을 강조한 요즘의 터보 엔진에 비해 거칠고 공격적이다.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나뉘겠지만, 싱글 빅터보 엔진의 맛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이만 한 선택도 드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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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속도 가속이지만 구불구불한 와인딩 로드에서의 움직임도 인상적이다. 네바퀴굴림 방식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한 하체는 운전자에게 필요한 정보를 빠짐없이 전달한다. 작은 차체만큼 휠베이스도 짧아 타이트한 코너에서도 불안한 기색이 없다. R값이 큰 코너에서는 운전자가 의도하는 방향으로 날카롭게 파고든다. 그러나 브레이크는 약한 편이다. 제동력을 조금만 보강하면 최신 스포츠 모델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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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보2는 확실히 세가 랠리를 즐기던 ‘올드보이’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가 가득한 차다. 혹자는 ‘확실히 한 시대를 풍미했지만 요즘 차들에 비해 성능은 떨어지는 차’라고 이야기하지만 에보2는 그룹B와 그룹A를 잇는 WRC 간판스타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물론 최근 란치아의 행보를 보면 이 차는 그저 빛바랜 추억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란치아 마니아들은 스트라토스와 에보2를 여전히 란치아의 대표 모델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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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가 되면서 자동차 시장의 변화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판매량이 전부인 상황이 되자 에보2와 같은 ‘돈 안 되는 차’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이처럼 돈 안 되는 차가 그 메이커의 이미지를 결정하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지금도 그런 현상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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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욱익(자동차 칼럼니스트)
사진
최재혁
제공
자동차생활(www.carlife.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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