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키려는 자와 빼앗으려는 자: 그랜저 vs 임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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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GM이 다시 한번 현대 그랜저를 겨냥했다. 이번 저격수는 쉐보레 임팔라. 선이 얇은 그랜저와는 달리 남성적인 분위기를 무기로 삼는다. 과연 임팔라는 준대형 세단 시장에서 그랜저와는 다른 성격의 선택지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까?
지난 가을, 한국GM이 쉐보레 임팔라를 투입했다. 한국 땅을 밟은 임팔라는 2013년 데뷔한 10세대. 한국GM이 ‘북미 시장 동급 베스트셀러’라고 자랑에 여념이 없는 모델이다. 이런 자신감의 배경에는 미국에서의 실적이 있다. 임팔라는 2014년 14만280대가 팔려나가며 동급 판매 1위를 기록했다. 참고로 국내 시장의 강자 현대 그랜저(수출명 아제라)는 같은 해 미국에서 7,232대 판매에 그쳤다.
2014년에만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다. 2006년 9세대 이후 임팔라는 북미 시장에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지난 10여 년 동안의 누적 판매수가 동급 1위다. 한국GM은 이런 성적들을 내세우며 임팔라가 국내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둬줄 것으로 자신하고 있다. 그간 한국GM의 플래그십 모델이 연달아 실패했기 때문에 기대는 더욱 큰 상황. 게다가 임팔라는 쉐보레 브랜드로는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준대형 세단이다.
그런데 미국에서의 성공이 한국에서의 안착을 보장할까? 두 나라의 소비자는 분명 취향이 다를 텐데 말이다. 임팔라의 전임자라고 할 수 있는 알페온의 사례가 좋은 예다. 알페온(현지명 뷰익 라크로스) 역시 북미에서는 적지 않은 성공을 거둔 모델이지만, 국내에서는 그랜저의 벽을 넘지 못했다. 한국GM은 당시에도 미국 이야기를 내세웠다. 그랜저 출시 때는 알페온 광고에 ‘그랜저의 다섯 번째 변신을 축하합니다. 북미 판매 1위 알페온으로부터’라는 자신만만한 카피까지 붙였었다.
사실 예전 한국GM의 자세는 ‘미국에서의 성공작이니만큼 한국에서도 잘 팔리겠지’라는 식이었다. 계기판, 공조장치 등 최소한의 현지화만 거친 제품을 그대로 소개했다. 때문에 국내 실정에 맞지 않는다는 볼 멘 소리가 적지 않았다. 스테이츠맨, 베리타스, 알페온 등으로 이어지는 기함들이 이런 구성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한국GM은 임팔라에 적지 않은 공을 들였다. 국내 시장에 맞게 구성을 다듬고 가격도 공격적으로 책정했다. 임팔라의 값은 3,409만~4,191만원. 전량 미국에서 들여오는 사실상의 수입차이지만, 미국보다 한국 가격이 더 싸다는 게 한국GM의 설명이다. 파워트레인과 편의 및 안전장비 등을 따져보면 그랜저와도 큰 차이 없는 수준. 현재 임팔라의 초반 흥행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지는 두고 봐야 알 일이지만, 그랜저와 제대로 붙어볼 수 있는 판을 마련한 건 확실해 보인다.
섬세한 챔피언과 당당한 도전자
현행 임팔라와 그랜저는 각각 2013년과 2011년부터 판매되기 시작했다. 자동차 디자인이 날이 갈수록 수명이 짧아지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임팔라가 조금 유리한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분위기는 2살 많은 그랜저가 더 젊다. 현행 그랜저는 현대차의 파격적인 디자인 시도가 한창일 때의 결과물. 또한 데뷔 이후 지속적으로 화장을 고쳐왔다.
특히 그랜저는 디테일이 뛰어나다. 차체 구석구석에 선을 긋고 면을 비틀어 긴장감을 강조했다. 현대차의 철판 가공 기술은 여느 프리미엄 브랜드와 비교해도 좋을 정도로 물이 오른 상태다. 세밀하게 다듬은 라디에이터 그릴, LED를 촘촘히 심은 안개등과 테일램프 등도 이런 멀끔한 분위기에 한몫하고 있다.
그러나 그랜저는 이제 지겨울 정도로 흔하다. 반면 임팔라는 신선하다. 국내에서는 갓 데뷔한 신인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과는 별개로, 임팔라는 그랜저에 비해 다소 보수적인 이미지다. 이전 세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해졌지만, 여전히 아기자기한 분위기보다는 당당한 느낌을 강조하고 있다.
임팔라의 키워드는 남성미다. 특히 납작 누른 헤드램프, V자 라디에이터 그릴, 두 개의 사각형을 새겨 넣은 보닛 등으로 연출한 앞모습은 카마로가 떠오를 정도로 스포티하다. 차체 길이도 5,110mm로, 그랜저보다 무려 190mm나 길다. 하지만 휠베이스와 너비가 비슷한 까닭에 실내공간 크기는 큰 차이가 없다. 대신 임팔라는 골프백 네 개가 세로로 들어가는 광활한 트렁크를 갖췄다. 국내 준대형 세단 주 고객층의 성향을 생각해 보면 대단한 장점이다.
외모의 차이는 실내로도 이어진다. 그랜저는 여성적이다. 또한 개성보단 균형을 택했다. 어디 하나 튀는 구석은 없지만, 허투루 만든 구석도 없다. 심지어 윈도 스위치도 정교하다. 도어트림 손잡이 안쪽에는 스펀지를 덧대는 세심함도 발휘했다. 가공과 조립 완성도도 눈부시다. 가죽, 우레탄, 플라스틱 등 각종 소재들을 곱게 다듬고 각 패널들을 빈틈없이 맞물렸다.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의 높은 완성도 역시 빼 놓을 수 없는 부분. 기능이나 그래픽이 화려하진 않지만, 편의성만큼은 따라올 경쟁자가 없다.
임팔라는 선이 굵다. 랩어라운드 스타일의 대시보드, 속도계와 회전계가 강조된 계기판, 구석구석을 장식한 노란색 스티치, 두툼한 가죽, 큼직한 로터리 스위치 등으로 강렬한 느낌을 냈다. 그러나 세밀한 마무리가 아쉽다. 특히 플라스틱과 우레탄 패널의 까끌까끌한 표면과 각 부품 간의 불규칙한 단차가 눈에 밟힌다.
알페온과 달리 편의장비는 풍성하다. 스마트폰 무선 충전 시스템, 한국형 내비게이션, 하이패스 룸미러, 리어 오디오 컨트롤 패널, 리어 시트 히터, 220V 다기능 콘센트 등의 장비를 트림에 따라 차등으로 갖췄다. 대부분이 한국GM이 국내 실정을 고려해 추가한 국내 전용 장비로, 한국GM의 자세가 달라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참고로 10개의 에어백, 차선이탈경고, 전방추돌경고, 사각지대경고 등의 안전장비는 모든 트림이 기본으로 갖춘다.
공간 크기는 두 모델 모두 넉넉하다. 성인 4명이 앉기에 충분한 수준이다. 개인적으로 뒷좌석은 임팔라가 조금 더 편하다. 사륜구동 시스템까지 고려한 플랫폼인 까닭에 바닥 중간이 솟아 있고 헤드레스트도 두 개뿐이지만, 머리 위 공간이 조금 더 넓어 여유롭다. 앞좌석 역시 마찬가지. 시트 바닥이 그랜저보다 낮게 깔려 있어 운전자세를 한층 더 스포티하게 설정할 수 있다. 그랜저는 쏘나타(LF)와 달리 아직 구형 플랫폼이라 시트포지션이 높은 편이다.
판이하게 다른 주행 성격
시승차는 그랜저 HG240(2.4L, 190마력, 24.6kg·m)와 임팔라 2.5 LT(2.5L, 199마력, 26.0kg·m)다. 모두 직렬 4기통 엔진과 6단 자동변속기를 맞물려 얹은 기본형으로, 각 모델의 판매를 견인하고 있다. 그랜저의 장점은 V6 못지않게 매끈한 회전감각. 힘은 딱 예상한 수준에 머물지만, 변속기의 반응이 빠릿빠릿해 가속 감각이 꽤 쾌적하다.
임팔라는 정반대다. 회전과 가속 감각 모두 묵직하다. 그랜저에 비해 차체가 무겁고 엔진도 더 고회전에서 힘을 내기 때문이다. 복합연비가 그랜저(11.3km/L)에 비해 0.8km/L 낮은 것도 이 때문이다. 물론 회전수를 올리면 굉장히 경쾌해진다. 특히 4,500rpm 이상에서는 출력에 대한 아쉬움이 사라진다. 하지만 패밀리 세단이라는 성격에 맞게 토크 밴드를 조정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변속기의 반응 역시 비교적 더딘 편이다. 수동 모드에서는 연료가 끊기는 6,800rpm에서도 물고 늘어질 정도로 스포티해지지만, 변속레버 머리에 붙은 토글식 수동 변속 스위치가 굉장히 불편해 사용이 꺼려진다.
그러나 기본기는 임팔라가 월등히 뛰어나다. 그랜저는 일정 속도를 넘기면 안정감이 급격하게 떨어진다. 접지가 희미해지지는 않지만, 하체가 급격한 무게 이동을 감당하지 못한다. 굽이진 길에서도 마찬가지다. 앞머리는 자세회복이 더디고, 꽁무니는 어쩔 줄을 몰라 허둥댄다. 사실 이는 그랜저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전 세대 현대 플랫폼의 공통점이다. 현재 아반떼, 쏘나타, 투싼, 제네시스 등 현대차 핵심 모델의 대부분은 개선을 거친 신형 플랫폼을 사용하고 있다.
반면 임팔라는 어느 상황에서도 든든하다. 점진적으로 무게가 늘어나는 스티어링과 단호하게 움직이는 서스펜션 덕분에 고속 안정성도 뛰어나다. 특히 댐퍼가 이완될 때의 반응이 세련됐다. 일정 수준 이상 수축되면 거칠게 튀어오르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은 매끈하게 움직인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접지 한계가 지나치게 낮은 타이어 정도. 또한 그랜저에 비해 실내도 굉장히 정숙하다. 엔진이 조용하고 이중접합차음유리, 노이즈 캔슬러 등 소음에 대한 대비책들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점점 더 치열해지는 경쟁
임팔라는 지난 9월 판매 시작 이후 3달간 약 4,000여 대가 팔려나갔다. 대기 수요자는 약 1만 명이다. 같은 기간 1만9,000여 대 판매된 그랜저에는 못 미치지만, 이 정도면 꽤 긍정적인 출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임팔라는 경쟁력이 있다. 현재로선 그랜저와는 다른 성격의 선택지로 자리매김하기에 상품성이 충분하다. 값과 구성 모두 크게 흠 잡을 곳이 없다.
그러나 이제부터가 문제다. 신차 효과는 수명이 짧다. 따라서 한국GM은 임팔라의 가치를 알리는 방법에 대해 지금보다 한층 더 진지하고 입체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그랜저는 ‘북미 시장 판매 1위’라는 것만 내세워서 뛰어넘을 수 있는 벽이 아니다. 국내에서 지난 30년간 꾸준히 명성을 쌓아온 모델이다. 한때는 현대차 라인업의 꼭짓점, 즉 국산차의 꼭짓점에 올라 있던 모델이기도 하다.
공급 부족 문제에 대한 해결도 시급하다. 당장 기아 K7이 출시 초읽기에 들어갔다. 대기 수요자의 마음은 갈대와 같다. 또한 현행 그랜저도 수명을 다해가고 있다. 신형의 등장이 머지않았다. 임팔라 역시 개선을 거치겠지만, 시장에 우선 안착해야 다음도 있다. 따라서 데뷔 초기인 지금이 중요하다. 신차 효과 바람을 타고 자신의 입지를 확고하게 다져야 한다.
물론 현대차도 안심할 상황은 아니다. 예전처럼 ‘만들면 팔리겠거니’라는 자세는 곤란하다. 그랜저가 다음 세대에서도 지금의 지위를 유지하려면 적지 않은 변화가 필요하다. 특히 기본기가 문제다. 점점 높아지는 수입차 점유율과 함께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중시하는 운전자가 늘어나고 있다. 소비자는 영리하다. ‘그랜저’라는 이름만으로 호소하는 데는 분명 한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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