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한 | 대륙의 기상, 혼다 파일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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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자동차는 제조사와 국가의 문화 또는 철학을 담는다. 그러나 이 말은 혼다 파일럿에게는 통하지 않는데, 분명히 일본의 제조사가 만들었지만 다분히 미국 문화와 가까운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큰 차체와 8명이 편안히 앉을 수 있는 시트, 대배기량 자연흡기 가솔린 엔진과 4륜 구동 방식을 갖춘 이 대형 SUV는 순수하게 미국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제작됐다. 그 행보가 마치 미국 모터사이클 시장을 시장을 점령하기 위해 대배기량 4기통 엔진을 탑재한 CB750을 개발했던 옛 혼다의 발자취와도 비슷하다.
혼다는 창립 초기부터 지금까지 우수한 품질의 모터사이클을 만드는 회사이고, 혼다의 모터사이클들은 대부분 운전자의 조작에 잘 따라주면서도 조종이 편하고 연비와 내구성이 우수하다. 이와 같은 특성은 자동차에도 그대로 이어졌는데, 혼다의 대표 준중형 자동차인 시빅은 내구성도 우수하고 연비도 좋아 1970년대 미국에서 큰 인기를 얻으면서 팔렸다(물론 실내 공간에 대해서는 불평이 있었다).
이에 고무된 혼다는 미국 시장만을 위한 중형 패밀리 세단 어코드를 출시해 인기를 지속적으로 이어나갔으며, 여기에 미국적인 색채를 더한 오딧세이(북미형과 일본형 모델이 따로 있다)를 더했다. 2003년에 대형 SUV인 파일럿을 미국 시장 라인업에 추가하면서 혼다는 준중형 세단, 중형 세단, 미니밴, SUV 시장을 아우르는 라인업을 갖췄다. 그리고 2015년에 풀체인지를 단행한 3세대 파일럿을 공개하면서 혼다의 위상을 확실히 다지고자 노력하고 있다.
파일럿은 3세대로 바뀌면서 최신 혼다의 디자인 코드인 다소 날렵하면서도 역동적인 디자인을 갖췄다. 크롬 도금된 프론트 그릴의 상단이 길게 연장되어 헤드램프까지 깊숙히 파고드는 형태는 어코드를 통해 처음 선보인 형태지만, 파일럿에서의 모습은 또 다른 신선함을 제공한다. 또한 그릴과 헤드램프가 한 덩어리처럼 조화를 이루기 때문에, 프론트 범퍼가 그만큼 작아 보인다.
사이드 라인도 기존 2세대 모델에 비해 큰 변화를 거치면서 루프 라인에 약간의 곡선을 부여하고, 벨트 라인과 캐릭터 라인을 상승시킴으로써 역동성을 강조했다. 테일램프는 ‘ㄱ’자 형태로 다듬어 미래지향적인 멋을 부여함과 동시에 테일게이트를 열었을 때도 브레이크 램프를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이와 같은 디자인으로 인해 멀리서 보면 날렵한 SUV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가까이에서 보면 이미지가 완전히 달라진다. 헤드램프와 프론트 그릴의 크기가 상당하며, 평균 키의 성인 배와 가슴 사이 정도의 높은 위치에 장착되어 있다. 프론트 범퍼도 면적이 상당히 크며 무엇보다 4,955mm에 달하는 전장과 20인치 알로이 휠, 타이어가 파일럿이 대형 SUV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전고도 1,755mm에 달하니(이마저도 2세대 모델에 비해 65mm 낮아진 것이다) 위압감이 배가된다. 마치 야누스의 두 얼굴을 보고 있는 듯 하다.
혼다의 최신 디자인 코드에 따라 파일럿의 실내도 기존 모델과 비교했을 때 현대적으로 다듬어졌다. 대시보드는 촉감이 좋은 우레탄을 사용해 제작했으며, 대시보드 일부분과 센터터널 그리고 스티어링 일부에 피아노 블랙 색상의 우드그레인(하이그로시에 가깝다)을 적용해 약간의 고급스러움을 부여했다. 전체적으로는 멋을 내기 보다는 실용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다듬어져 있으며, 대용량 텀블러도 보관할 수 있는 컵홀더와 DSLR 카메라를 수납하고도 공간이 남는 대형 센터콘솔은 파일럿이 미국 시장을 위한 차임을 상기시킨다.
계기반은 속도는 디지털로, 엔진 회전과 수온, 연료는 아날로그로 표시하며 4인치 모니터를 통해 차량의 상태와 기능 작동 여부를 쉽게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센터페시아에 위치한 8인치 LCD 모니터는 음량 제어를 비롯한 모든 기능을 터치로 제어하도록 만들어졌으며, 그 아래에는 공조장치 스위치와 CD 플레이어가 위치한다. 다수의 버튼을 적용한 스티어링 휠은 다양한 기능을 제어할 수 있지만, 익숙해지기 까지는 시간이 꽤 소요된다. 반면 심플한 스타일의 기어노브는 순식간에 적응할 수 있다.
가죽으로 마감한 시트는 크기가 크고 넉넉해서 덩치가 큰 운전자도 편안하게 앉을 수 있다. 2열 시트도 성인 3명이 탑승하기에 부족함이 없으며, 버튼만 누르면 자동으로 2열 시트가 젖혀지기 때문에 3열 승하차도 쉽게 진행할 수 있다. 3열 시트는 성인 3명이 탑승하기에는 약간 부족하지만 단거리 주행에서는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으며, 평소에는 바닥에 수납해 광활한 트렁크 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다. 2열에도 공조장치 스위치와 시트 열선 스위치, USB 포트가 준비되어 있어 쾌적한 탑승 환경을 만들 수 있다.
파일럿에 탑재된 엔진은 최고출력 284마력, 최대토크 36.2kg-m을 발휘하는 V6 3.5L i-VTEC 가솔린 엔진이다. 여기에 마찰 재질의 최적화 등 개선을 거친 6단 자동변속기를 조합해 네 바퀴를 구동한다. 흔히 대배기량 가솔린 엔진이라고 하면 연비가 좋지 않다는 인식이 있지만, 파일럿은 주행 조건에 따라 기통 모드를 변환하는 가변 실린더 제어 기술을 적용하고 있다. 쉽게 말하면 V6 엔진을 주행 상황에 따라 V4로 변환할 수도 있다는 것인데, 이로 인해 연비 절약이 가능하다. 실주행 중 기록한 연비는 8.0km/l로 시승과 촬영을 위해 혹사된 환경을 생각하면 우수한 편이다.
일반적으로 대형 SUV를 운전할 때는 차체 크기 때문에 주변 환경에 큰 신경을 쓰게 되지만, 파일럿은 차체 크기를 의식하지 않고 편안하게 운전할 수 있다.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는 혼다 센싱(Honda Sensing)이 장착되어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전면에 장착된 레이더와 카메라를 통해 ACC(정속 주행 장치), LKAS(차선 유지 보조 시스템), CMBS(추돌 경감 제동 시스템), RDM(차선 이탈 경감 시스템)을 통합 제어하는 혼다 센싱은 편안한 운전과 함께 탑승객의 안전을 지켜주는 전자 장비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동차에 있어 기초적인 사항인 차체 강도와 스티어링 휠의 크기, 시트 포지션 등이 운전자가 편안함을 느낄 수 있도록 맞춰져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혼다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다른 자동차와 비슷한 크기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오메트리의 절묘한 조정으로 인해 훨씬 안정된 자세로 운전할 수 있다. 높은 위치에서 다른 자동차들을 내려다보면서 주행함에도 불구하고 능동적이면서도 안정적인 주행이 가능하다는 것은 운전자는 물론 가족에게도 큰 안심이 된다. 물론 운전석 뿐만 아니라 2,3열에 탑승한 승객도 동일한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4가지 주행모드를 지원하는 4륜구동 시스템과 높은 최저지상고로 인해 임도도 평지처럼 주행할 수 있다. 그러나 미국 시장을 노리는 모델답게 차체 제어보다는 승차감에 초점을 맞춘 서스펜션을 장착하고 있기 때문에 급격한 코너링이나 요철을 통과할 때는 좌우 롤링이 발생한다. 안정적인 차체와 부드럽게 회전하는 엔진으로 인해 스포츠 주행에 욕심을 내는 운전자도 있겠지만 파일럿은 어디까지나 가족을 위한 대형 SUV임을 잊으면 안 된다.
광활한 대륙의 기상을 갖춘 파일럿은 넉넉한 실내 공간과 수납 공간, 소음이 거의 없는 가솔린 엔진, 외부 소음을 차단하는 도어 실링과 방음 유리 등을 갖춰 가족만의 오붓한 공간을 만들어 준다. 주중엔 도심에서, 주말엔 교외에서 가족의 행복을 위해 노력해야 하고 때론 험한 길도 주행해야 하는 이 시대의 가장들에게 잘 어울리는 SUV라고 할 수 있다. 5,460만원 이라는 가격과 가솔린 엔진으로 인해 구입이 망설여진다면, 한 번쯤은 가족들과 함께 시승해 보기를 권한다. 어쩌면 파일럿은 혼다 소이치로가 항상 주장했던 ‘실용적인 자동차’의 완성형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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