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승기] ‘열정’으로 완성한 고성능차, 현대 아반떼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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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자동차는 지금으로부터 31년 전인 1990년에 2도어 스포츠루킹카 ‘스쿠프’를 내놨다. 비록 고성능 차 대접을 받진 못했지만, 스쿠프는 현대차가 스포츠카의 세계에 발을 들인 의미 있는 차였다. 이후 현대차는 1996년에 티뷰론, 2001년에 투스카니를 내놓으면서 계보를 이어갔다.
나는 투스카니 데뷔 당시에 운 좋게도 개발 담당자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다. 이때 담당자가 흥미로운 개발 비화를 들려줬다.
“처음에 투스카니 콘셉트를 잡을 때 가장 역점을 둔 부분은 토요타 셀리카나 미쓰비시 이클립스보다는 훨씬 더 좋은 차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셀리카와 이클립스의 경우 터보와 네바퀴굴림 기능을 갖춘 이미지 리딩 모델이 있지만, 판매 대부분은 티뷰론과 같은 2.0ℓ 자연흡기차예요. 결국 티뷰론은 ‘현대’라는 핸디캡 때문에 소비자들에게 ‘셀리카나 이클립스보다 못한 차’라고 평가를 받은 겁니다. 따라서 최소한 같은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그들보다 뛰어난 차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이 담당자는 투스카니 개발 도중 일본을 찾았다. 자동차 전문가를 만나 조언을 듣기 위해서였다.
“이때 초대 스카이라인부터 제6대(R33)까지 기획했던 사쿠라이 신이치라는 분을 만났어요. 옛날 프린스 시절부터 일본 스포츠카의 계보를 만드신 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스포츠카에 대한 긴 토론을 한 후에, 제가 찾아온 목적을 밝혔습니다. “지금 스포츠카 프로젝트가 추진 중인데, 앞바퀴굴림 방식이다. 어떻게 하면….”
여기까지 말했는데 사쿠라이 신이치가 그의 질문을 끊고 이렇게 말했다.
“사람을 잘못 찾아온 것 같다. 자네 질문이 뭔지 알지만, 지금은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것이 없다. 자네가 진정한 순수혈통의 스포츠카를 만들고자 한다면 섀시가 바뀌게 되는 때에 다시 찾아와라. 내가 보기에 현대자동차는 아직 젊은 회사고, 앞으로의 성장이 기대된다. 그런 회사에서 근무하는 자네는 행운아다. 마지막으로 충고하고 싶은 것은, 기획하는 스포츠카가 최대 출력이 200마력을 넘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200마력이 넘는 앞바퀴굴림차는 일반인에게 아주 위험할 수 있다. 네 다리가 달린 동물 중에 앞다리가 뒷다리보다 큰 동물이 얼마나 있느냐를 생각해봐라.”
이 말을 들은 현대차 담당자는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지만 ‘경쟁자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하자. 투스카니로 좀 더 힘을 키우고, 충분한 힘이 비축되었을 때 수프라나 스카이라인과 경쟁하자’라고 다짐했다고 한다. 지금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분명히 경쟁자들을 앞서야 투스카니가 성공한다는 것이고, 그래야만 진정한 스포츠카 분야에서 싸울 수 있다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너무 큰 욕심을 부리기보다는, 두 번으로 나눠서 분명한 진보를 해야 한다는 것이 그때 얻은 가장 큰 소득이었다.
“스포츠카 개발에서 메이커가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열정입니다. 상품기획 담당자뿐만이 아니라, R&D의 각 부문 담당자의 마음속에도 열정이 살아 있어야만 제대로 된 스포츠카가 만들어집니다. ‘내가 만들고 있는 차가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꿈을 주는 차’라는 열정, 그것만 있다면 못 할 것은 없습니다.”
이러한 열정 덕에 현대차는 티뷰론에서 한 단계 발전한 투스카니를 내놨다. 그리고 2008년에는 드디어 뒷바퀴굴림 스포츠카인 ‘제네시스 쿠페’를 완성했다.
제네시스 쿠페는 현대차의 이미지를 또 한 단계 끌어올렸다. 특히 국내 자동차 경주대회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2010년대 중반이면 나올 줄 알았던 제네시스 쿠페 후속의 소식은 아직도 잠잠하다. 국내 자동차 경주대회에서도 아직 제네시스 쿠페를 대체할 만한 차를 찾지 못했다. CJ슈퍼레이스만 하더라도 슈퍼 6000 클래스 바로 아래인 GT1 클래스에서 뛰는 차량이 대부분 제네시스 쿠페다.
돌이켜보면, 제네시스 쿠페 후속이 나올 무렵이었던 2010년대 중반이 바로 현대자동차가 고성능차에 대한 계획을 재정립했던 시기였다. 현대차는 2015년에 럭셔리 브랜드인 ‘제네시스’를 론칭했고, 초기 라인업 계획에 스포츠 쿠페도 들어있었다.
2017년, 제네시스 G70 데뷔 때 만난 현대차 주병철 디자인 담당 이사는 “제네시스 브랜드 라인업에 쿠페가 추가될 예정인 건 확실한데, G70의 쿠페형이 될지, 제네시스 쿠페 같은 정통 쿠페가 될지는 계속 검토 중”이라면서 “경쟁 모델에 맞서려면 G70 차체에 2도어 타입을 추가하는 게 좋겠지만, 기존에 내놓으려던 정통 쿠페와 시장이 겹칠 수 있다. 두 종류가 모두 나올지, 그중에 한 종류만 나올지는 좀 더 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한 바 있다.
결과적으로 2020년까지 나온다던 제네시스 브랜드의 스포츠 쿠페는 아직도 나오지 않았다. 대신 현대자동차는 ‘현대’ 브랜드의 고성능 디비전인 ‘N’의 라인업을 속속 채워갔다. 2017년 i30 N(국내 미 출시)을 시작으로 2018년 벨로스터 N 그리고 올해 코나 N과 아반떼 N을 연이어 시장에 내놨다.
◆인제스피디움에서의 가슴 떨린 만남
지난 3일, 인제스피디움에서 만난 아반떼 N은 기대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스쿠프부터 티뷰론, 투스카니, 제네시스 쿠페의 계보를 잇는 차가 드디어 나왔구나 하는 생각에서다. 물론 그 이전에 벨로스터 N이 국내에 판매되고 있었지만, 아반떼 N에 거는 사람들의 기대는 훨씬 컸다.
그 이유는 몇 가지로 요약된다. 우선 3도어인 벨로스터 N과 달리 아반떼 N은 4도어여서 데일리카로 쓰기에 훨씬 좋다. 또한 벨로스터 N이 해치백 스타일인 데 비해, 아반떼 N은 세단 스타일이어서 무게 균형감이 좀 더 좋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여기에 벨로스터 N 데뷔 이후 3년이 지난 시점이어서 그동안 기술적인 진보도 이뤄졌을 거라는 기대감도 깔려 있다.
아반떼 N은 기본형 아반떼보다 차체 길이가 25㎜ 길고 높이는 5㎜ 낮고, 너비는 같다. 고성능차여서 차체 높이를 많이 낮출 줄 알았는데 불과 5㎜밖에 차이가 안 난다. 하지만 기본형 아반떼의 차체 높이도 1420㎜로 상당히 낮은 편이다. 그러니까 최초 설계부터 고성능 모델을 염두에 두고 개발했다는 얘기다. 대신 기본형에 비해 앞 시트 포지션을 10㎜ 낮추면서 실제 주행에서는 좀 더 다이내믹한 느낌을 즐기도록 했다.
재미있는 건 기본형과 달리 앞바퀴 윤거(좌우 바퀴 중심축 사이 거리)가 뒷바퀴보다 넓다는 점이다. 17인치 휠(225/45R17)을 장착한 기본형 아반떼의 윤거는 앞 1579㎜, 뒤 1590㎜로 뒤가 더 넓다. 그러나 아반떼 N은 19인치 휠(245/35ZR19)을 장착했고, 앞 윤거가 1584㎜, 뒤 윤거가 1579㎜로 변경됐다. 이는 280마력으로 대폭 올라간 출력을 안정적으로 구현하기 위해서 앞바퀴의 윤거를 더 넓게 설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타이어의 경우 벨로스터 N은 18인치는 미쉐린, 19인치는 피렐리를 장착하는데, 아반떼 N은 19인치 미쉐린 파일럿스포츠 4S 한 가지만 장착된다.
이번 시승회는 브레이크 테스트, 슬라럼, 공도 주행, 서킷 주행의 순서로 진행됐다. 가장 먼저 만난 브레이크 테스트는 인스트럭터가 지정한 파일런에 가장 가까이 멈추는 걸로 순위를 가렸다. 짧은 거리에서 시속 60~70㎞ 정도로 달리다가 원하는 지점에 딱 멈춰야 하는데, 아반떼 N은 예상보다 훨씬 일찍 멈춘다. 고성능 엔진에 맞게 용량을 키운 브레이크 덕분이다.
슬라럼은 본격적인 공도 주행과 서킷 주행에 앞서 몸을 푸는 단계로, 강화된 섀시를 맛볼 수 있는 순서다. 탄탄한 서스펜션과 차체 곳곳에 덧댄 보강재 덕에 확연히 줄어든 롤링이 느껴진다.
이제 공도로 나설 차례. 여기서는 노멀 모드와 N 모드 등 다양한 주행 모드별로 테스트를 했다. 가장 인상적인 건 노멀 모드에서의 승차감이다. 고성능차는 대부분 승차감이 딱딱해 데일리카로 쓰기에 부담스러울 수 있는데, 아반떼 N은 승차감이 아주 좋다. 웬만한 요철충격은 잘 흡수하고, 과속방지턱을 넘는 데도 부담이 없다.
스포츠 모드로 바꾸면 차의 성격이 확 달라진다. 서스펜션은 단단해지고, 엔진 반응은 더 공격적으로 변한다. 코나 N은 스포츠 모드에서 많이 튀었는데, 아반떼 N은 그보다 승차감이 좋다.
승차감 못지않게 인상적인 건 엔진 사운드다. N 모드 또는 커스텀 모드에서 3000rpm을 넘겨 달리다가 가속 페달에서 발을 떼면 ‘따다다당’ 소리를 내면서 팝콘 터지는 소리가 귓가를 때린다. 현대차는 여기에 N 사운드 이퀄라이저 기능을 더했다. ‘스포티’와 ‘하이 퍼포먼스’ ‘TCR’ 등 세 가지로 특성화된 프리셋 사운드를 마련했고, 취향에 따라 음량과 음역대를 달리해 들을 수도 있다. 실제 주행에서 이 소리 듣는 재미는 상당했다.
드디어 서킷 주행 차례.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서서히 속도를 높였다. 여기서 가장 돋보였던 건 직선 주행에서 NGS(N 그린 시프트)의 강력한 가속감과 플랫 토크, 높은 타이어 접지력이었다. NGS 버튼을 누르면 최고출력이 10마력 올라가는데, 이는 20초 동안 쓸 수 있다. 최고출력 280마력이 순간적으로 290마력까지 상승하는 것이다. 마치 F1 경주에서 DRS를 쓰듯이 가속감이 확 높아지기 때문에 운전쾌감이 치솟는다.
기본으로 장착된 미쉐린 파일럿스포츠 4S는 명성에 걸맞게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성능을 보여줬다. 코너가 많고 고저 차이가 심한 인제스피디움에서 타이어는 끈끈하고 믿음직한 접지력을 보여줬다.
다만 주행이 지속되면서 브레이크는 조금 밀리는 경향을 보였다. 주행 당일 섭씨 30도가 넘는 뜨거운 날씨에 가혹한 서킷 주행이 반복되면서 나타난 현상인데, 일반도로 주행에선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만약 이 차로 서킷을 자주 가는 운전자라면 N 퍼포먼스 킷에 마련된 모노블록 브레이크를 꼭 선택하길 권한다.
◆아반떼 N의 라이벌은?
아반떼 N의 기본 가격은 3212만원부터 시작한다. 여기에 N DCT 패키지(190만원), N 라이트 스포츠 버켓 시트(100만원), 현대 스마트 센스(55만원), 컨비니언스(65만원), 컴포트Ⅰ(60만원), 컴포트Ⅱ(15만원), 선루프(40만원)의 선택 사양이 마련된다. 이들을 모두 선택하면 3737만원이 된다.
현대차는 좀 더 고성능을 원하는 이들을 위해 N 퍼포먼스 옵션도 준비했다. 모노 블록 브레이크 & 19인치 단조 휠(매트 블랙) 패키지는 355만원, 같은 옵션으로 전면 가공 단조 휠은 370만원, 퍼포먼스 인테이크 킷 49만원, 워크 인 인테리어 패키지 30만원, 알칸타라 인테리어 패키지 67만원, 카본 익스테리어 패키지 295만원, 카본 듀얼 싱글 팁 머플러 115만원 등이 그것이다.
만약 위 풀 옵션에 N 퍼포먼스의 고가 옵션들을 모두 고른다면 4663만원이 된다. 기본 가격에 비해서는 1451만원이 오른 가격이다. 고민은 여기서 시작된다. 기본 가격은 비교적 접근하기 쉬운 가격이지만, 원하는 옵션을 모두 고르면 4000만원 중반이 훌쩍 넘어간다.
수입차 중에는 아반떼 N과 맞비교할 차가 마땅치 않다. 폭스바겐 골프 GTI가 수입되지 않기 때문에 전륜구동 고성능 수입차를 찾기란 쉽지 않다.
성능과 가격에서 그나마 비슷한 모델을 찾는다면, BMW 235i X드라이브의 경우 사륜구동에 306마력 엔진을 얹었는데 6180만원이고, 메르세데스 A45 AMG는 역시 사륜구동에 387마력 엔진을 얹고 6810만원의 가격표를 달았다. 300마력이 넘는 고성능 모델은 모두 사륜구동을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반떼 N에도 사륜구동이 추가되었으면 하는 이유다.
아반떼 N은 어느 날 갑자기 ‘뿅’하고 나온 게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 스쿠프를 바탕으로 현대차가 31년 동안 갈고닦은 실력에다 개발자들의 열정이 더해져 완성된 차다.
현대차의 도전은 여기서 멈추면 안 된다. 위에 언급한 경쟁차들에 맞서기 위해 사륜구동 고성능차도 내놔야 한다. 제네시스 G70에 3.3 터보 버전이 있긴 하지만, AMG나 M에 맞서기에는 성격이 좀 다르고, 아반떼 N보다는 가격 접근성이 떨어진다. 그러니까 현재의 아반떼 N 가격 수준에서 고를 수 있는 사륜구동 고성능 모델을 기대하는 것이다. 현대차의 건투를 빈다.
임의택 기자 (ferrari5@rpm9.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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