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보르기니 우라칸 LP 580-2, 서킷에서 벌어진 싸움소와 한판 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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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나라 거리에서도 진귀한 수퍼카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지만 기자가 어렸을 때는 자동차 전문지에서 사진으로만 볼 수 있는, 말 그대로 그림의 떡이었다. 그래도 갖가지 명절 특수(?)로 용돈이 두둑해질 때마다 일제 플라모델을 사서 조립하는 호사를 누렸던 기억이 있다.
당시 가장 강렬한 인상을 준 수퍼카를 꼽으라면 단연 람보르기니 카운타크(이탈리아 방언 쿤타치가 맞는 표기지만 국내에서는 영어식 이름인 카운타크로 불린다)다. 플라모델만 가지고 놀다 친구 집에서 걸윙 도어가 열리는 다이캐스트 모델을 보고 군침을 흘렸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꿈은 이뤄진다고 했던가? 카운타크가 단종된 지 10여년이 흐른 2003년경 동경해 마지않던 람보르기니 카운타크를 일본에서 시승할 기회가 생겼다. 끝물이라고 할 수 있는 25주년 기념모델이었는데, 차는 생각보다 무척 억셌다.
묵직한 논 파워 스티어링 휠은 그렇다쳐도 클러치 답력이 정말 하드했다. 왼발이 후둘거려도 반클러치는 쓰지 말라는 차주의 경고성 조언(?)을 뒤로 하고 출발하려는데 식은 땀을 한바가지 흘렸다. 최고출력 455마력을 내는 V12 5.2L 엔진의 강한 구동력을 반클러치를 최소화하면서 부드럽게 뒷바퀴에 전달하기가 무척 어려웠기 때문이다. 결국 엄청난 휠 스핀을 일으키며 출발했는데, 타이어가 헛돌며 생긴 뭉게구름에 차주의 눈이 휘둥그레지던 모습을 사이드미러를 통해 목격했다.
억센 황소와도 같던 카운타크지만 출발 후에는 큰 부담 없이 달릴 수 있었다. 특히 고속주행성능은 당시 라이벌이던 페라리 테스타로사보다 유연한 느낌이었다. 까불거리는 페라리에 비해 듬직한 안정감이 느껴졌다고 할까? 수퍼카 시장의 숙적이 제각기 독보적인 존재감을 뽐내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LP 580-2(좌)와 LP 610-4(우). 생김새는 같아도 굴림방식이 다르다
다시 10여년이 흘러 강원도 인제 스피디움에서 람보르기니 우라칸을 만났다. 2014년 데뷔한 우라칸은 가야르도 후속으로, 카운타크의 혈통을 잇는 아벤타도르 아래에 위치하는 엔트리 모델이다. 아우디 산하에서 R8과 플랫폼을 공유해 탄생한 가야르도가 10년 동안 1만4,022대가 팔리는 대히트를 기록한 바 있는데, 우라칸 역시 지난해까지 3,858대나 팔리며 전작의 인기를 이어가고 있다. 참고로 가야르도가 나오기 이전 람보르기니의 연간 판매량은 400대를 넘지 못했다. 주요모델의 전체 생산량(카운타크 2,042대, 디아블로 2,884대, 무르시엘라고 4,099대)만 봐도 엔트리 람보르기니의 높은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우라칸은 가야르도 후속으로 람보르기니의 엔트리 모델이다
인제 스피디움에 우라칸 LP 610-4 쿠페와 LP 580-2를 만났다. LP 580-2의 경우 LP 610-4 스파이더와 함께 올해 우라칸 라인업에 더해진 따끈따끈한 신상이다. 당연히 관심은 온통 LP 580-2에 쏠렸다. 현행 람보르기니 가운데 가장 저렴한 모델인데다 디아블로 VT부터 고수해온 네바퀴굴림 구동계 대신 뒷바퀴굴림을 채택한 차이기 때문이다.
람보르기니가 네바퀴굴림을 쓰기 시작한 이후 창업주 페루치오가 추구하던 싸움소의 야성미가 사라진 것 같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실제 네바퀴굴림이 기본이던 무르시엘라고가 과거 카운타크와 비교해 너무나도 편안해 깜짝 놀란 적도 있다. 소비자가 원하는 수퍼카의 콘셉트가 바뀐 탓일 것이다.
기자만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은 것 같다. 우라칸의 전작 가야르도가 단종되기 직전 한정판으로 나온 LP 550-2 발렌티노 발보니를 기억하는가? 그 차는 창업주 페루치오 시절부터 40년 동안 일한 람보르기니의 전설적인 테스트 드라이버 발렌티노 발보니의 은퇴 기념작이다. 미우라에서 가야르도까지 모든 람보르기니를 테스트하고, 출고 전 검사를 담당했던 그는 출력을 줄이고 서스펜션을 튜닝한 다음 뒷바퀴굴림 구동계를 조합해 칼 같은 몸놀림을 자랑하는 자신만의 가야르도를 제시한 바 있다.
어찌 보면 우라칸 LP 580-2는 발보니가 추구한 방향을 그대로 따른 차다. LP 610-4의 성능을 조금 낮추고 뒷바퀴굴림 구동계를 넣은데다가 서스펜션을 부드럽게 튜닝해(앞쪽 10%, 뒤쪽 5%) 오버스티어 성향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무게를 33kg 줄이고, 앞뒤 무게를 40:60으로 맞췄다. 그밖에 19인치 휠(시승차는 옵션인 20인치)을 끼우고 카본세라믹 디스크 브레이크를 옵션으로 준비했다.
LP 580-2는 LP 610-4보다 성능은 조금 낮지만 재미(뒷바퀴굴림)라는 요소를 추가해 자신만의 독특한 가치를 지닌다
LP 610-4와 LP 580-2의 겉모습은 미묘한 차이가 있다. 전자는 앞범퍼 흡기구가 더 넓고 매시 타입으로 처리한 반면 후자는 냉각기능에 초점을 맞춘 심플한 구성이다. 뒷모습 역시 610-4가 580-2에 비해 장식적인 요소가 더 많다. 하지만 미드십 엔진을 둘러싼 플라잉 버트레스나 사이드 펜더를 부풀리는 손장난(?) 따위는 하지 않았기에 두 차는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아우디그룹에 편입된 카로체리아 이탈디자인을 지난해부터 이끌고 있는 필리포 페리니가 그려낸 우라칸의 디자인은 말 그대로 예술품에 가깝다. 날카롭고 정밀하면서도 일체감이 넘치는 보디는 그 어떤 수퍼카와 비교해도 카리스마가 넘친다. 그가 전임자 루크 동커볼케로부터 람보르기니 디자인 부문의 지휘봉을 넘겨받았을 때 우려의 목소리가 컸지만 지금은 람보르기니 고유의 쐐기형 디자인을 21세기에 걸맞게 해석해낸 진짜 실력자로 추앙받고 있다.
나파 가죽과 알칸타라로 곳곳을 장식한 실내는 헥사고날(육각형) 디자인이 눈길을 끈다
먼저 LP 580-2에 올랐다. 실내는 LP 610-4와 동일하다. 나파 가죽과 알칸타라로 곳곳을 장식한 실내는 헥사고날(육각형) 디자인이 눈길을 끈다. 아벤타도르에서 시작됐지만 송풍구, 시동 스위치, 변속 버튼 등 온통 헥사고날 테마로 장식한 우라칸이 훨씬 도드라진다. 눈썰미 있는 독자라면 알아챘겠지만 우라칸은 외관에도 여기저기 헥사고날 도안이 숨겨져 있다. 조잡스럽지 않게 디테일에 강한 아우디의 장기가 맘껏 발휘됐다. 또 우라칸은 알루미늄으로 섀시를 짜넣은 가야르도와 달리 앞뒤는 알루미늄, 캐빈룸은 카본파이버로 만든 하이브리드 구성이다. 그래서 더 가볍고 견고하다(보디 패널은 알루미늄이다).
12.3인치 TFT 방식 디스플레이가 적용된 계기판은 아우디 버추얼 콕핏의 람보르기니 버전이다. 한국형 인스톨링 작업으로 내비게이션까지 완벽하게 지원된다. 라이벌 페라리를 비롯한 다른 수퍼카 브랜드는 아직 이런 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기에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12.3인치 TFT 방식 디스플레이 계기판은 아우디 버추얼 콕핏의 람보르기니 버전이다
LP 580-2의 누적 주행거리는 1,700여km로 속칭 ‘헤드가 슬슬 열리기 시작하는 상태’다. 어느 정도 길이 든 만큼 풀 스로틀을 해도 차에 무리가 가진 않을 것이다. 참고로 우라칸 같은 수퍼카들은 출고 전에 공장에서 발렌티노 발보니 같은 테스터들이 시험주행을 꼼꼼히 한다. 그래서 누적 주행거리가 200~300km인 상태로 고객에게 인도되기도 한다. 혹시 땅속 항아리에 숨겨둔 돈을 꺼내 수퍼카를 사려는 독자가 있다면 참고하기 바란다. 남이 타던 중고차를 받은 게 절대 아니다.
시동을 걸자 과급기 시대에 아직 살아남아 있는 자연흡기 방식의 명기 가운데 하나인 V10 5.2L 엔진이 기지개를 켠다. 최고출력 580마력/8,000rpm, 최대토크 55.1kg·m/6,500rpm로 610-4보다 4~5% 낮다. 듀얼클러치 방식 7단 변속기를 통해 뒷바퀴를 굴리는 시승차는 제원상 0→100km/h 가속 3.4초, 최고속도 320km/h를 낸다. 역시 LP 610-4에 비해 각각 0.2초, 5km/h 낮은 수치다.
자연흡기 5.2L V10은 최고출력 580마력, 최대토크 55.1kg·m이다
스티어링 휠 스포크 근처의 방향지시등 스위치를 누르며 트랙에 올라섰다. 상향등, 와이퍼 스위치 등도 같은 곳에 있어 운전 중 스티어링 휠에서 손을 뗄 일이 없다. 편의성도 고려했겠지만 차의 특성상 그럴 수밖에 없다. 스로틀을 열자마자 가속력이 폭발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두손으로 스티어링 휠을 움켜쥐게 된다. 최신 수퍼카들이 이런 패키징을 즐겨 쓰게 된 배경 아닐까?
상체가 시트 등받이에 파묻히며 거세게 질주하기에 ‘대포알처럼 튀어나간다’는 진부한 표현 외에는 쓸 말이 없다. 그런데 편안한 GT카를 모는 것 같아 숨막히는 압박감은 없다. 시승차는 기본형보다 한 사이즈 큰 앞 245/30ZR 20, 뒤 305/30ZR 20의 타이어를 끼웠으나 탁탁 튀지 않고 스무스하게 내달린다.
일정한 조향각을 유지하고 코너 정점을 향해 들어가면 중간쯤부터 차머리가 안쪽으로 스윽 파고든다
자연흡기 엔진답게 토크는 회전수에 비례해 꾸준하게 높아진다. 그러다 2,000rpm을 넘어설 때와 6,000rpm을 지날 때 확 터지는 순간이 있다. 전자는 편안하게 달리는 장거리 크루징 때 활용하면 될 것 같고, 후자는 지금처럼 서킷을 누빌 때 쓰면 되겠다.
이탈리아어로 ‘영혼’을 뜻하는 아니마(ANIMA, Adaptive Network Intelligent Management) 스위치를 눌러 주행 모드를 스트라다에서 스포츠로 바꿨다. 단박에 차가 울부짖기 시작한다. 방금 전까지의 우라칸이 거세된 육우라면 이제는 싸움소다.
아직 타이어가 달궈지지 않았지만 580-2는 노면에 찰싹 달라붙어 내달린다. 스트라다 모드보다 스포츠 모드 때 서스펜션이 더 부드럽다는 사람도 있지만 체감하긴 어렵다. 오히려 옵션으로 달린 람보르기니 다이내믹 스티어링(LDS)의 효과가 더 강하게 느껴진다. 일정한 조향각을 유지하고 코너 정점을 향해 들어가면 중간쯤부터 차머리가 안쪽으로 스윽 파고들기 때문이다. 이런 차 간만에 타본다.
코르사 모드는 주행안정장치(ESC) 도움 없이 오롯이 운전자의 실력으로 달려야 한다
열심히 달리는 우라칸에 괜히 어깃장을 놓고 싶어 다음 코너는 약간 오버스피드로 들어갔다. 앞바퀴 접지력을 무너뜨려 살짝 언더스티어를 일으키기 위해서다. 그런데 이번에도 오버스티어다. 이 정도면 관성 드리프트도 부담 없이 일으킬 수 있겠다(고속에서나 가능하기에 아차 하는 순간 큰 사고를 내 폐차할 수 있다).
옵션으로 달린 카본 세라믹 브레이크(LP 610-4는 기본)는 반복되는 급감속에도 믿음직한 제동성능을 보여주어 최대한 브레이킹 포인트를 늦추면서 코너를 적극적으로 공략할 수 있었다. 달리고 멈추는 실력이 워낙 뛰어나 운전자는 스티어링 휠 조작에만 집중할 수 있다.
이제 코르사 모드로 달릴 차례다. 서스펜션이 한층 탄탄해지고, 엔진과 변속기 반응이 훨씬 더 명확해진다. 트랙용 코르사 모드는 주행안정장치(ESC)의 도움 없이 오롯이 운전자의 실력으로 달려야 하지만 앞에서 적은 455마력짜리 카운타크를 시승하며 느꼈던 극적인 긴장감은 없다. 하지만 밖에서 보면 우레와 같은 배기음을 내뿜으며 총알처럼 질주하고 있을 것이다. 배짱만 두둑하다면 파워 드리프트는 식은 죽 먹기다. 싸움소를 이렇게 릴렉스하게 올라타고 다니게 해준 람보르기니 기술력에 찬사를 보낸다.
달리고 멈추는 실력이 워낙 뛰어나 운전자는 스티어링 휠 조작에만 집중할 수 있다
맘에 들지 않는 점도 있다. 83L에 불과한 연료탱크다. 초고속 질주가 가능한 독일 아우토반 같은 곳에서 대차게 달리면 1시간마다 주유소에 들러야 할 것 같다. 물론 100km/h 정도의 정속주행 때는 400km 이상도 달릴 수 있다. 실린더 절반에 연료공급을 차단해 연비를 높이는 장치 덕분이다. V10 5.2L 엔진이 V5 2.6L로 작아지는 셈이다. 배기량을 줄이고 터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페라리와 달리 자연흡기 방식을 고집하는 람보르기니의 경제적 해법이다.
싸움소와 기자의 한바탕 전투는 시간이 흐르면서 소강상태를 보인다. 이를 악물고 한번 더 공격할 때마다 뒷바퀴굴림 우라칸은 살랑살랑 엉덩이를 흔들며 기자의 일격을 방어한다. 열정이 샘솟는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밤새도록 즐기고 싶다. 운전하는 동안 갖가지 스트레스를 주는 기존의 수퍼카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원초적인 운전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이 순간을 오래 기억해야겠다.
우라칸 LP 580-2는 단순히 값이 싼 엔트리 람보르기니가 아니다. 윗급 모델보다 성능은 조금 낮지만 재미(뒷바퀴굴림)라는 요소를 추가해 자신만의 독특한 가치를 지니게 됐다. 이는 수치로 표현하기 힘든 감성적인 퍼포먼스이기도 하다. 숙명의 라이벌 페라리조차 아직은 여기까지 신경 쓰지 못하고 있다. 람보르기니의 창업자 페루치오가 저세상에서 미소를 지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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