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차의 탈을 쓴 고급차 : 현대 그랜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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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신형 그랜저가 데뷔했다. 현대차의 기함 자리에 다시 오를 모델인 만큼 눈부신 완성도를 자랑한다. 렉서스, 아우디 등의 전륜구동 모델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 현대로 위장한 제네시스로 봐도 무방하다.
차체강성과 서스펜션 세팅. 최근 현대차가 신차 행사에 끊임없이 들이미는 메뉴다. 주행안정성에 대한 콤플렉스를 씻어내듯, 얼마나 더 단단하고 정교하게 다듬었는지 목메어 강조하고 있다. 신형 그랜저의 데뷔 무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핫스템핑, 구조용 접착제, 플랫폼 지오메트리, 임팩트 여진 등의 복잡한 단어들이 난무했다. 그랜저가 아닌, 여느 스포츠 세단의 설명을 듣는 것 같았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럴 만도 하다. 이번 그랜저의 의미는 이전과 사뭇 다르다. 아슬란이 실패하고 제네시스와 에쿠스가 독립하면서, 그랜저는 다시금 현대차의 사실상 기함 자리에 올랐다. 한층 더 ‘완벽한 차’라는 사실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주행질감’은 현대차 스스로도 인지하고 있는 최대 약점이었다.
현대차가 늘어놓은 그랜저에 대한 이야기는 꽤 구체적이었다. 고강도 강판을 확대 적용하고 핫스템핑으로 빚은 철판을 기존보다 3배, 구조용 접착제 역시 9.8배 늘려 비틀림 강성을 23.2% 끌어올렸다. 앞뒤 서스펜션의 상하 마운트와 패키지 트레이, 그리고 리어 멤버 등의 구조도 바꿨다.
말뿐인 개선이 아니었다. 그들이 그랜저에 담은 변화는 피부로 느껴질 정도로 뚜렷했다. ‘본질로부터’라는 거창한 슬로건을 내걸었던 쏘나타(LF)가 그랬듯, 가고 서고 도는 느낌이 이전보다 한결 명확해졌다. 결과는 쏘나타보다 더 드라마틱하다. 이젠 렉서스, 아우디 등의 전륜구동 고급 세단만큼이나 믿음직스럽다. 그간 비난의 대상이 되었던 두루뭉술한 움직임을 말끔하게 걷어냈다.
고급차 기준의 품질
물론 운전감각만이 아니다. 모든 부분을 고급차의 잣대에 맞췄다. 가령 안팎 조립 품질은 흠잡을 곳이 없다. 외부 패널의 단차는 자로 잰 듯 일정하고, 내부 패널은 빈틈없이 맞물렸다. 디테일과 소재 가공 역시 물이 오를 대로 올랐다. 심지어 버튼 표면까지 섬세하게 다듬었다. 센터콘솔 안쪽 후크에 패드를 붙여 닫을 때의 소음과 감각도 조정했다. 시트 쿠션도 부위별로 강도가 다르다. 특히 뒷좌석 헤드레스트가 인상적이다. 작지만 머리를 아주 포근하게 감싼다.
외모는 신형 i30를 통해 선보인 새 스타일링을 따랐다. 낮게 깔린 헤드램프와 어깨선, 그리고 아래쪽이 살짝 말린 캐스캐이딩 그릴로 스포티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러나 i30처럼 발랄하진 않다. 균형 잡힌 비율과 힘찬 선들 덕분에 한층 더 견고해 보인다. 그랜저 HG에서도 볼 수 있었던 리어 펜더의 곡선과 뒷모습 전체를 가로지르는 테일램프도 이런 느낌에 한몫하고 있다.
실내 디자인 역시 신형 i30와 같은 맥락이다. 납작한 대시보드에 모니터를 세워 붙여 산뜻한 느낌을 냈다. 오른쪽으로 쭉 뻗어나간 모니터 하우징은 논란과 달리 꽤 자연스럽다. 하지만 그 안쪽에 자리잡은 아날로그 시계는 실제로도 어색하다. 실내공간의 크기와 편의 및 안전장비의 수준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이전 그랜저보다 더 넉넉하고 화려하다. 신형 그랜저는 앞차를 따라 달리는 어드밴스드 스마트 크루즈 컨트롤과 주행 조향보조 시스템, 그리고 후측방충돌회피 시스템 등이 통합된 스마트센스도 갖췄다.
프론트 레이더는 라디에이터 그릴 중앙 안쪽에 숨겼다. 때문에 엠블럼이 ‘H’ 로고를 홀로그램으로 새긴 얇은 패널로 대체된다. 스마트 크루즈 컨트롤의 완성도는 꽤 높다. 앞차와의 간격을 세밀하게 조정하며 끼어드는 차도 제대로 감지한다. 그러나 주행조향보조 시스템은 조금 거칠다. 제네시스 G80과 달리 차선유지보다는 차선이탈방지 쪽에 가깝다. 참고로 이 스마트센스와 같은 2단계 자율주행 장비는 2~3년 안에 현대차의 모든 모델에 도입될 예정이다. 완전 자율주행차(5단계)의 양산은 2030년으로 계획되어 있다.
매끄럽되 스포티한 운전 감각
현재 그랜저에는 2.4L 가솔린, 3.0L 가솔린, 2.2L 디젤 등 세 가지의 엔진이 준비된다. 3.3L 가솔린과 하이브리드도 곧 추가될 예정이다. 2.4L 가솔린(세타2 GDi)의 블록 파손과 2.2L 디젤(R)의 엔진오일 증가 문제는 전부 개선되었다는 게 현대 측의 설명이다. 시승차는 최고출력 266마력, 최대토크 31.4kg·m의 힘을 내는 3.0 모델. 5세대 그랜저의 3.0L 람다를 다듬은 람다2 엔진으로 최고출력 4마력, 최대토크 0.2kg·m가 낮아졌다.
수치는 하락했지만 가속 감각은 훨씬 경쾌하다. 실사용 회전영역의 출력을 개선하기도 했지만, 변속기가 자동 6단에서 자동 8단으로 바뀐 효과가 더 크다. 그러나 쏘나타 터보처럼 록업 클러치의 작동 타이밍을 바짝 당긴 타입의 변속기는 아니다. 토크컨버터를 적극 활용해 매끄러운 감각을 강조했다. 직결감은 조금 떨어지지만 그랜저라는 모델의 성격에는 이런 세팅이 더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응답성이나 변속 속도는 꽤 빠듯하며 회전수를 띄우면 엔진 사운드도 꽤 짜릿해진다.
스티어링은 R-MDPS이 아닌, C-MDPS 방식이다. 하지만 피드백이 솔직하고 반응도 정확하다. 샤프트와 토션바의 강성을 높이고 프로세서와 기어비를 개선해 반응 시간을 0.02초로 줄인 덕분이다. 드라이브 모드에 따른 답력 변화도 꽤 뚜렷하다. 참고로 드라이브 모드에는 운전자의 조작을 실시간으로 분석해 반응을 바꾸는 스마트 모드가 추가됐다.
승차감은 부드럽다. 그러나 자세 변화에 대한 반응은 단호하다. 덕분에 무게 이동에 대한 부담감이 없고 고속안정성도 뛰어나다. 거친 노면에서 몰아붙이면 차체 앞뒤가 불협화음을 내긴 하는데, 문제 삼을 정도는 아니다. 오히려 266마력을 앞바퀴로만 소화하는 차가 이렇게 안정적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섀시 완성도가 뛰어난 까닭에 출력에 아쉬움이 생길 정도다.
현대로 위장한 제네시스?
현대차는 신형 그랜저를 내수용으로 못박았다. 동시에 북미에서는 그랜저를 대체하는 전용 모델을 출시하겠다고 밝혔다. 여러 가지 정황상 신형 그랜저는 북미에서 제네시스로 편입될 가능성이 크다. 과거 렉서스 ES가 일본에서 토요타 윈덤으로 팔렸던 것처럼. 그간 그랜저(수출명 아제라)의 북미 판매가 시원치 않았고 신형의 완성도가 눈부시게 개선됐으니 완전 뜬구름 잡는 소리는 아니리라. 어쩌면 신형 그랜저는 현대차 중 고급차로 개발됐지만, 고급차 브랜드의 엠블럼을 달지 않은 최초의 모델이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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