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한 이름값의 모범적인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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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고 높은 SUV는 별 관심이 없다. 큰 덩치 때문에 운전이 거치적거리고 달리기라도 할라치면 뒤뚱거리며 둔하게 반응하기 일쑤인 탓이다. 차는 자고로 낮고 넓어 경쾌하게 내달려야 제 맛 아닌가? 하지만 세상사 예외는 항상 있는 법. 다이내믹하면서도 마초적인 카리스마로 타는 재미가 남다른 SUV들은 한번쯤 소유해 즐기고 싶어진다. 물론 마음을 빼앗는 SUV가 흔하지 않다는 게 문제이긴 하지만 말이다.
시승 뒤 GLE는 내 SUV 위시리스트에 올라갔다. 물론 모는 재미가 대단히 재미있거나 움직임이 극적일 만큼 다이내믹하기 때문에 선택한 건 아니다. 부드럽고 조용하며 안락한 맛에 반해버렸다. 점점 우아한 메르세데스-벤츠가 좋아지는 걸 보면 세월 따라 취향도 슬슬 변하나 싶다. 2012년 인기를 구가하던 드라마 <신사의 품격>을 기억하는가? 장동건의 애마로 나오며 ‘베티’라는 애칭으로 불리던 차는? 당시 ML, 이제는 GLE가 된 바로 이 녀석이다. 이름이 생소하다고? 그럴 수 있다. 최근 메르세데스-벤츠가 SUV 라인업에 힘을 더하면서 이름을 싹 고쳐 부르기 시작했다. 간략히 정리를 해보자.
메르세데스-벤츠의 SUV 라인업은 GLA·GLC·GLE/GLE 쿠페·GLS·G-클래스로 넘어간다. GL로 시작하는 모델이 메르세데스-벤츠 SUV라고 생각하면 되고 그 뒤에 붙은 알파벳으로 덩치와 가격을 가늠하면 된다. C-클래스급 SUV는 GLC, S-클래스급은 GLS인 것이다. GLE는 메르세데스-벤츠의 중형 SUV이자 가장 인기 좋던 ML에서 이름을 고치고 매무새를 가다듬은 간판스타다.
국내에서 만날 수 있는 GLE는 세 가지. 204마력짜리 2.2 디젤의 250 d와 258마력과 63.0kg·m가 넘는 최대토크를 내는 V6 3.0 터보 디젤의 350 d, 퍼포먼스 끝판왕 AMG GLE 63이다. AMG GLE 63 4매틱은 V8 5.5리터 가솔린엔진을 얹고 557마력과 71.4kg·m 토크로 아스팔트를 짓이긴다. 라인업 가운데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하고 많이 팔릴 모델은 350 d이리라.
첫인상이 멋있다. 젊은 얼굴이 다이내믹하고 호전적이다. 한창 회춘 중인 메르세데스-벤츠의 패밀리룩이 중형 SUV 얼굴에도 가득하다. 커다란 프런트그릴과 100미터 밖에서도 눈에 띄는 크고 위풍당당한 세 꼭지 별 엠블럼, 앞범퍼 아래까지 파고든 에어인테이크 그릴이 다분히 공격적이다. 주름을 잡아 올린 보닛과 두 개의 에어덕트까지 가세해 카리스마 넘치는 인상에 힘을 더한다. 중형 SUV의 길고 커다란 덩치가 압도적이다.
두툼한 보디에 사이드 캐릭터라인을 넣어 입체적이지만 ML의 흔적이 다분한 D필러로 오면 앞모습과 달리 조금 심심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이는 뒤쪽 공간이 넓고 큰 차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문제다. 리어 디퓨저와 범퍼 양끝으로 몰아 만든 듀얼 배기구를 알루미늄으로 치장해 젊고 고급스러운 감각을 이어갔다. 하지만 젊은 얼굴에 비해 뒤는 밋밋하다. 앞으로 등장할 신형 GLE 디자인이 더 많이 기대되는 이유다. 스티치 선명한 갈색 가죽과 우드로 치장한 실내에서 브랜드 특유의 우아함이 흘러 넘친다. 브라운과 베이지의 조합이 넉넉한 실내를 포근하게 감싼다.
관리에 자신만 있다면 이 실내조합도 좋은 선택이 되겠다. 덩치만큼 여유롭고 고급스러운 가죽시트에 몸을 맡긴다. 쿨링과 히팅을 함께 품은 가죽시트는 바구니에 계란을 담듯 포근하고 넉넉하게 몸을 받아 감싼다. 보기 좋은 계기반은, 가운데 정보창을 기준으로 왼쪽에 속도계, 오른쪽에 타코미터가 자리잡았다. 대시보드 가운데 자리한 화질 선명한 8.4인치 커맨드 디스플레이 모니터는 크기와 위치가 안성맞춤이고 실내디자인 아이덴티티 같은 엔터테인먼트 시스템과 전화버튼이 그 아래에 정갈하게 자리잡았다.
운전자가 자주 사용하는 기능(통풍과 열선시트, VDC, 에코 스타트/스톱 등)은 알루미늄 버튼으로 꾸며 고급차 느낌을 더욱 강조한다. 넉넉한 실내공간에 수납공간도 다양하고 큼직하다. 센터터널 속 두 개의 컵홀더는 냉온기능까지 버튼으로 조절할 수 있는데다 온도에 따라 파랑과 빨강으로 무드등을 바꾸는 세심함까지 갖췄다. 12V 파워아울렛이 앞뒤 곳곳에 네 개나 되고 운전석 버튼 하나로 해치를 여닫을 수 있을 정도로 편의장비도 풍성하다. 로직 7과 만난 하만카돈 사운드시스템은 음역대 구분이 명쾌하고 사운드 스테이지와 공간감이 좋아 오래 들어도 감동이 줄지 않는다.
시동버튼을 눌렀다. 디젤 특유의 진동과 소음이 극도로 절제돼 가솔린 모델인가 싶을 만큼 정숙하다. 9단 기어박스와 궁합을 맞추는 3.0리터 V6 터보 엔진은 늘 여유롭고 부드럽다. 가속페달을 깊게 밟아도 언제나 온화하게 반응한다. 60이 훌쩍 넘는 토크라면 좀더 자극적이고 화끈하게 속도를 올릴 만도 하지만 메르세데스-벤츠는 우직하다.
기어비를 잘게 썰어 촘촘히 톱니를 바꿔 무는 9단 변속기와 네바퀴굴림 시스템 때문에 가속이 싱겁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만큼 안정감은 깊다. 그러면서도 언제 어디서든 힘이 넘쳐 흐른다. 페달을 짓이겨 밟지 않아도 가감속은 빠르다. 속도와 도로상태에 따라 주도면밀히 조율하는 스티어링과 에어서스펜션 감각 또한 우월하다. 순두부와 두부 사이쯤의 승차감을 유지하면서 바닥에 달라붙어 코너를 휘젓는다. 댐핑 시스템을 더한 에어매틱 에어서스펜션의 드라마틱한 능력이 빛을 발한다.
다이내믹 셀렉트 모드 다이얼을 돌려 주행모드를 스포트로 맞춘다. 단수를 낮춰 회전수를 높이고 하체와 스티어링을 팽팽히 조여 긴장을 더한다. 세단처럼 낙낙하던 SUV가 라텍스 매트리스와 돌침대를 오가는 다이내믹 SUV로 돌변한다. 안락하게 타는 맛에서 경쾌하게 모는 맛으로 취향을 바꿔 재미를 키운다. 골라 탈 수 있는 주행모드는 모두 다섯 가지. 컴포트와 스포트, 윈터, 오프로드 모드에 스티어링과 엔진, 서스펜션을 취사선택 해 조합할 수 있는 인디비주얼 모드다. 넉넉한 SUV는 별도로 M버튼을 달아 완벽한 수동모드도 갖췄다. 스티어링 휠 뒤로 바싹 달라붙은 패들시프트로만 변속이 가능해 운전하는 맛을 키운다.
세팅도 적극적이어서 속도를 줄이면 자동으로 단수를 낮추지만 속도가 높아져도 수동으로 변속하지 않으면 4천300rpm 부근 레드존에서 웅웅거리며 드라이버 손길을 기다린다. 추운 날이 길어지고 눈, 비가 잦아지는 국내 기후에 대응하기 위해 윈터모드도 품었다. 타이어에 출력을 부드럽게 전하고 엔진브레이크를 적극적으로 쓰면서 주행안정성을 높인다. 여기에 오프로드 모드에 DSR(경사가 심한 험로에서 저속으로 안전주행을 알아서 하는 주행장치)까지 갖춰 캠핑과 아웃도어마니아들의 취향까지 저격한다.
오후 6시 퇴근시간. 잠실에서 김포까지의 지옥길을 나섰다. 정지할 듯 멈추지는 않는, 가속과 감속을 수백 번 해야 하는 러시아워에서 차간거리를 유지하며 알아서 주행하는 디스트로닉 플러스를 작동시켰다. 조향어시스트에 스톱앤고 파일럿을 품은 GLE는 막히는 길을 동승자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약 두 시간의 지옥 같은 정체구간에서 가속페달을 밟은 숫자는 채 다섯 번도 되지 않았고 브레이크페달은 한 번도 밟지 않았다. 정지하면 시동이 꺼지면서 알아서 멈추고, 가속페달만 살짝 밟아주면 무슨 일 있었냐는 듯 막히는 길을 알아서 잘도 기었다.
ML에서 GLE로 이름을 바꿔 단 메르세데스-벤츠의 중형 SUV는 장점과 매력이 다분하다. 넘치는 편의장비와 디스트로닉 플러스, 다양한 주행모드로 상황과 취향을 매만진다. 매끈하고 정숙한 V6 디젤엔진은 담대한 토크로 꾸준하고 묵직하게 속도를 다스리고 고급스러운 마감재와 꼼꼼하고 완벽한 조립품질, 넉넉한 실내공간과 만족스런 감성품질은 차를 모는 내내 융숭히 대접받는 기분을 선사한다. GLE는 이름만 바꾼 채 신차 코스프레를 하는 모델이 아니다. 새로운 이름 그 이상의 가치와 상품성, 의미를 담은 SUV로 완벽히 진화한 것이다.
Mercedes-Benz GLE 350 d 4Matic
- Price : 9,580만원
- Engine : 2987cc V6 터보 디젤, 258마력@3400rpm, 63.2kg·m@1600rpm
- Transmission : 9단 자동, 4WD
- Performance 0→100 : 7.1초, 225km/h, 9.7km/ℓ, CO₂ 200g/km
- Weight : 2,350kg
LOVE : 우아함에 첨단장비와 최신기술로 무장한 럭셔리 중형 SUV
HATE : 심심한 뒷모습이 아쉽다. ML의 흔적은 신형에서 지워질 거다
VERDICT : 부드럽고 여유로운 SUV를 찾는다면, 추천 1순위다
[본 기사는 car 매거진에서 GEARBAX와의 제휴로 제공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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