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조 308 SW 전국유람기 #2-여행도 달리기도 즐거운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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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새벽, 눈을 비비고 일어났다. 천년고도 경주의 새벽은 고요했다. 전날부터 맹렬한 바람이 몰아쳤는데, 전국이 기록적인 한파로 꽁꽁 얼어붙을 즈음이었다. 평야지대인 경주는 영하 8도의 날씨에 강풍으로 걷기도 힘들 정도였다. 어쨌거나 해가 밝기 전에 움직여야 했다.
겨울 여행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는 일출을 보기가 비교적 수월하다는 것이다. 해가 짧아 오후 5시가 조금 지나면 금새 어두워지지만, 아침해 역시 늦어 7시 반이 지나야 해가 수평선 너머로 떠오른다. 조금만 부지런을 떨면 근사한 일출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기왕 경주까지 내려왔으니 동해안의 제일 아랫쪽 해안길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어둠을 가르고 1시간 반 정도를 달려 포항 호미곶으로 향했다. 밤운전이라 걱정됐지만 포항 가는 길은 정비가 고속화도로가 잘 돼있기 때문에 큰 부담은 없다.
포항 호미곶은 남한 육지의 최동단이다. 그 이름은 한반도를 호랑이 형상에 빗댔을 때 호랑이의 꼬리에 해당하는 부분이라는 데에서 유래했다. 그 옆에는 노래 "영일만 친구"로 유명한 영일만이 있다. 남동해안에서는 울산의 간절곶과 함께 대표적인 해맞이 장소로 손꼽히는 곳이기도 하다. 아마 "상생의 손" 위로 떠오르는 태양 사진을 누구나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호미곶에 도착했을 때는 7시 10분 쯤. 일출을 보러 온 관광객들이 듬성듬성 보일 뿐 인기척은 많지 않았다. 차가 흔들릴 정도로 강한 바닷바람을 피해 차 안에서 높은 파도를 보며 여명을 기다렸다.
일출 시간이 지났지만 수평선에 짙게 깔린 구름때문에 이른바 "오메가"라 불리는 수평선 일출은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어떠하리, 잠시 뒤 구름 너머로 떠오른 해는 찬란한 여행의 아침을 밝혀주기에 충분히 멋졌다. 호미곶의 명물인 상생의 손을 배경으로 사진을 남기고 조금 더 아침해를 감상하다가 이내 움직이기로 했다.
다음 목적지는 부산. 호미곶에서부터는 울산 간절곶까지 해안도로를 따라가기로 했다. 925번 지방도가 호미곶에서부터 이어지지만, 지방도보다 더 해안가쪽으로 나가면 도로번호조차 매겨지지 않은 해변길이 동해바다를 따라 이어진다. 속도를 내기도 어렵고 시간도 오래 걸리지만 이런 길이야말로 여행의 꽃이다.
지난 여행기에서도 밝혔듯, 푸조 308 SW는 이런 구불구불한 길에 정말 잘 어울린다. 에메랄드빛 바다와 푸른 하늘에 어울리는 이국적인 외모도 그렇지만, 하체 세팅이나 주행감각은 한국의 지방 도로에 최적이라 할 만하다. 장시간 운전해도 피로도가 낮고, 운전이 지루하지도 않다. 푸조 특유의 글래스 루프는 여행 내내 거의 닫은 적이 없는데, 작은 차체임에도 놀라운 개방감을 선사해 준다. 햇살을 만끽하며 여행하기에 최적의 차인 셈이다.
최근 국내에서는 독일차처럼 단단하고 절도있는 하체가 인기지만, 독일차의 돌덩이같은 하체는 노면이 나쁜 곳에서 되려 피로를 유발한다. 포장화율은 높아도 노면이 썩 좋지 않은 지방 도로나 국도에서는 오히려 시골길을 달리며 다듬어진 프랑스식 하체가 더 편안한 것이다. 부드러움과 탄탄함의 절묘한 조화 덕에 곳곳에 도랑이 파여있고 해안선을 따라 휘어진 도로에서도 308 SW는 유쾌한 달리기를 이어간다.
1시간 여를 내려갔을까, 포항의 또 다른 명소 구룡포가 나온다. 구룡포는 대게가 맛있기로도 소문났지만, 겨울에는 단연 과메기로 유명하다. 차가운 겨울바람에 꽁치가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며 건조되면 비릿하면서 고소한 과메기가 만들어진다. 참새가 방앗간을 지날 수 있으랴, 필자 역시 구룡포 전통시장에 들러 과메기를 한 보따리 사들고 여정을 이어갔다.
포항에서 아름다운 바닷길을 따라 내려가다보면 다시 경주시가 나온다. 경주 해변에서는 지리 교과서에서나 봤던 부채꼴 형상의 주상절리와 세계적으로 유례 없는 수중릉인 신라 문무대왕릉 등을 만날 수 있다. 단조로울 것만 같은 동해안에도 볼 거리가 가득하다.
파도소리가 아름다운 주전 몽돌해안과 공장으로 둘러싸인 시내를 가로지른다. 울산은 길이 넓지만 화물차가 많이 다니는 탓에 도로 사정이 썩 좋은 편은 아니다. 익숙치 않은 도로 환경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운전을 이어갔다. 태화강을 건너 20분여를 더 달려 마침내 간절곶에 다다랐다. 거대한 우체통과 드라마 촬영지로 유명한 간절곶은 호미곶 못지 않은 일출 명소다. 계절에 따라 육지 최동단인 호미곶보다 더 빨리 해가 뜨는 날도 있다. 이국적인 풍경의 유원지를 둘러보고 더 길이 막히기 전 부산으로 이동했다.
간절곶까지 와서는 부산과 거의 맞닿은 곳이다. 부산-울산간 고속도로에 오르면 해운대 한가운데로 내려올 수 있다. 숙소가 위치한 광안리도 멀지 않다. 부산은 몇 차례 와 보면서 이제 길도 제법 익숙해졌고, 구경도 많이 했기에 지인들을 만나고 맛집을 들르며 쉬어가는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미래적인 고층빌딩과 아름다운 해변 도로가 어우러진 해운대가 부산의 손꼽히는 드라이브 코스임은 두 말하면 입 아플 정도다. 광안리 앞바다를 가로지르는 광안대교는 낮에도 밤에도 건널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 여유가 있다면 오륙도 공원이나 태종대, 남포동 거리를 둘러봐도 좋고, 달맞이고개 너머의 송정이나 기장에서 조용한 운치를 즐겨도 좋겠다. 냉채족발, 돼지국밥, 밀면, 씨앗호떡 등 부산의 명물들도 곳곳에 있으니 빠짐없이 먹어보자.
부산 한가운데에는 방송 송신탑이 세워진 황령산이 있는데, 정상의 봉수대까지 차로 올라갈 수 있다. 오르는 길의 풍경도 멋지고 봉수대에 올라 탁 트인 하늘 아래의 부산을 감상하는 것도 좋다. 특히 밤에 올라가면 야경이 예술인데, 서울의 남산에서 내려다보는 것과는 또 다른 기분이다. 황령산은 워낙 오르막길이 가파르기에 종종 소형차들이 힘에 부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308 SW는 우려와 달리 사람 다섯을 태우고도 처지지 않고 구배길을 올랐다. 숫자 상의 제원만으로 느껴지지 않는 디젤 엔진의 옹골찬 힘 덕이다.
빡빡한 일정 탓에 부산에서 오래 머무를 수는 없었다. 대신 부산에서의 둘째날 아침에는 모처럼 부산까지 왔으니 멀지 않은 밀양댐의 와인딩 로드도 들르기로 했다. 광안리에서는 1시간 반 정도면 갈 수 있는 곳이다. 노중에 경남 양산 원동마을도 지나는데, 이른 봄이면 낙동강 줄기를 따라 달리는 철길과 만개한 매화로 절경이 연출된다. 한 장의 그림엽서같은 풍경을 보고 싶다면 꼭 가볼 만한 곳이다.
밀양댐 와인딩 로드는 경남 지역에서는 아름다운 풍경과 멋진 도로로 소문난 코스다. 고저차가 심하고 다양한 굴곡의 코너가 이어져 즐거운 주행을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산 중턱에 걸쳐있는 도로 형상이 수도권의 청평호변길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연출한다. 지도 상으로는 배내사거리부터 밀양댐에 이르는 1051번 지방도 구간이다.
여정 도중 여러 와인딩 로드를 지났지만, 숙소에 짐을 풀어놓고 가볍게(?) 온 것은 밀양댐이 처음이었다. 겉보기에는 짐차처럼 생긴 308 SW가 어느 정도 달려줄 수 있는 지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에 페이스를 조금 높여봤다.
이번에도 역시 푸조 특유의 서스펜션 세팅이 빛을 발한다. 편평비가 높은 타이어에 부드러운 하체때문에 고속 코너링에서 다소 롤링이 발생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쉬 자세를 놓치지 않는다. 긴 휠베이스는 코너에서의 거동을 한결 안정적으로 이끌어 내리막 브레이킹과 같이 앞으로 하중이 쏠리는 상황에서도 불안감이 없다. 나쁘게 말하면 해치백보다 둔한 것이지만, 비슷한 크기의 세단과 비교해도 좋을 정도의 민첩함은 여전히 발휘된다. 가혹한 주행에도 순정 브레이크 또한 충분한 제동력을 보인다.
무엇보다 기대 이상인 것은 파워트레인이다. 제법 몰아붙이는 주행에도 변속기는 망설임 없이 적극적인 변속을 선보였고, 1.6L HDi 엔진은 시종일관 매끄럽고 민첩하게 반응했다. 회전수 한계때문에 와인딩에서 최적화된 주행을 펼치기는 어렵지만, 스포츠 모드를 켜면 유격감 없이 묵직하고 기민한 스티어링 감각까지 더해지면서 충분히 "재미있는" 주행이 가능하다. 이 급의 왜건 바디에서 기대하는 것 이상의 움직임에 흥분될 정도다.
여행이 계속될 수록 308 SW에 대한 신뢰가 높아졌다. 미운 점보다는 예쁜 구석이 더 많이 보인다. 와인딩 주행에도 불구하고 누적연비는 16km/L 밑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탁월한 연비와 즐겁고 안락한 운전 덕에 장시간 운행에도 지치지 않았고, 28인치 캐리어와 보스턴 백, 배낭을 실을 때도 트렁크 정리 따위를 걱정하지 않고 그저 트렁크를 연 뒤 휙 던져넣기만 하면 됐다. 여행 파트너로 이만한 차가 또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308 SW를 대체할 차는 마땅히 떠오르지 않는다.
오전 중 숙소로 돌아와 짐을 챙기고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부산을 떴다. 끔찍한 정체에 시달리는 동서고가차도를 지나 거가대교행 고속화도로에 올라탔다. 이제 거제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남해 일주에 나서는 것이다.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닷길, 한려수도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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