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프와 함께한 모압 트레일 드라이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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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프를 괜히 열어달라고 했나? 사방으로 먼지가 들이치지만 모압 트레일을 달리는 지프 위에서 기자는 미소가 끊이지 않는다. 이렇게 헤벌쭉하고 가다 먼지는 둘째치고 혀 깨무는 거 아닌가 몰라
인천에서 미국 댈러스 포트워스까지 13시간, 댈러스 포트워스에서 그랜드정션까지 2시간 반, 그리고 숙소까지 또 3시간의 거리를 이동하는 중이었다. 대기시간까지 합치면 근 20시간 동안 강행군을 하며, 피곤에 지친 일행이 이동 중인 차 안에서 반 빈사상태에 빠져 있을 때, 인심 좋은 아저씨가 차를 세우고 다급히 깨웠다. 졸린 눈을 간신히 뜨고 있는 사이에도 아저씨의 입은 기다림이 없다. “수많은 서부영화부터 가장 최근엔 〈미션 임파서블〉을 촬영한 블라블라블라…”
잠에 취해 좀비처럼 느릿느릿 차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니 쌀쌀한 초봄의 건조한 바람이 기자의 몸을 휘감았다. 한기로 온몸이 움츠러드는 순간, 눈앞에 펼쳐질 장관을 보았다. 문학으로 먹고 살지는 않지만 어찌됐든 글로 먹고 사는 기자의 비루한 필력이 이렇게 답답할 수가 없다. 이 순간에도 그때 보았던 풍경과 전율이 생생한데, 글로 표현할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몰랐다. 앞으로 펼쳐질 풍경과 경험하게 될 것에 비하면 이건 시작일 뿐이라는 것을 말이다.
지금 우리가 향해 가는 곳은 미국 유타주 그랜드카운티에 위치한 모압(Moab)시티다. 모압시티는 전형적인 미국 서부의 지형이다. 조금 황량하지만 광활한 벌판과 일자로 쭉 뻗은 도로. 수천수만년 동안 바람의 침식작용으로 생성된 높은 바위기둥과 지구의 나이테라고 불리는 거대한 협곡이 굽이굽이 펼쳐져 있었다.
우리는 바로 이곳에서 이틀간 지프를 시승하게 된다. 아직 숙소에 도착하지 않았지만 벌써 기자의 손은 묵직한 스티어링 휠을 움켜쥐고 광활한 자연을 향해 기어를 변속했다.
숙소는 모압시티에서 30여분 떨어진 곳. 모압시티 주변은 전세계 어드벤처 마니아들이 MTB, ATV, 카약, 오프로드 주행 등을 즐기러 찾아오는 곳이다. 또한 매년 열리는 ‘모압 지프 이스턴 사파리’ 행사로 지프 마니아들의 성지로 군림하고 있는 명소이다. 지프 브랜드 역시 신차 개발에 이 지역을 적극 활용한다고 한다. 우리가 방문하기 1주일 전, 올해의 행사는 끝났다. 현지인의 말에 따르면 행사에 참가한 지프가 1만여대에 달했다고.
기자가 이역만리 떨어진 이곳을 방문한 이유는? 짐작했겠지만 지프의 본고장에서 지프의 성능을 직접 체험해보기 위해서다. 특히 올해는 지프 탄생 75주년이 되는 해이기에 그 의미가 더욱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 FCA는 각국의 자동차 전문기자들을 모압으로 초청해 지프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경험할 수 있는 행사를 마련했다. 가장 미국적인 곳에서 미국적인 색채가 강한 자동차를 경험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다.
행사 무대인 리조트는 미국 서부의 그림 같은 자연을 병풍처럼 두른 곳에 위치했다. 뒤에는 콜로라도강이 흐르고, 앞에는 웅장한 바위기둥들이 우뚝우뚝 서 있다. 행사를 주최한 FCA그룹 내 지프 담당자들은 리조트에 지프 헤리티지 모델과 올해 초 디트로이트 오토쇼에서 공개된 지프 75주년 기념모델뿐 아니라 뉴욕 오토쇼에서 공개한 그랜드 체로키 트레일호크와 서밋, 체로키 오버랜드, 콘셉트 모델도 준비했다. 모두 시승이 가능했다. 윌리스 MB부터 700마력을 내는 지프 트레일 캣 콘셉트 모델까지 말이다.
이번 행사는 앞에 적은 지프들에 대한 프레젠테이션과 리조트 근처 알처스국립공원의 오프로드 트레일에서 지프 75주년 기념모델과 새로 추가된 모델을 시승하는 순서로 짜여져 있다. 설레서 잠이 안온다. 75년 지프의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기대된다.
JEEP, PAST
먼저 지프의 역사와 지프의 기념비적인 모델들에 관한 이야기다. 지프는 브랜드를 넘어 ‘짚차’라고 불리는 네바퀴굴림 오프로드 SUV의 대명사가 됐다. 지프는 지금의 SUV 열풍의 시발점이 된 브랜드라고 할 수 있다.
지프의 시작은 윌리스라는 자동차회사다. 뉴욕 출신의 존 윌리스가 설립한 이 회사는 1908년 오버랜드자동차를 인수해 본격적인 자동차 메이커로 성장한다. 1912년 회사 이름을 윌리스-오버랜드로 바꾸고 한때 포드에 이어 미국 제2의 자동차회사로까지 성장하게 된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경영이 어려워져 결국 부도가 났다. 공장들은 GM으로 넘어가고, 개발 중이던 윌리스 식스의 생산권은 크라이슬러에 넘어갔다. 숨만 쉬며 명백을 유지하던 윌리스-오버랜드는 다시 한번 전쟁을 통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 육군은 군용 모터사이클과 포드 모델T를 대체할 군용차를 공모하게 된다. 135개 메이커를 초청했지만 윌리스-오버랜드와 아메리카 밴텀만이 관심을 보였다. 후에 포드도 경쟁에 뛰어들게 된다. 결국 윌리스-오버랜드가 선보인 윌리스 MA가 채택, 최종 공급자로 선정됐다. 윌리스-오버랜드는 윌리스 MA를 개량한 윌리스 MB를 군용으로 납품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네바퀴굴림 SUV의 시작이다. 전장을 누비며 제2차 세계대전 승전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윌리스 MB는 지프라는 명칭(GP와 유진 더 지프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으로 전세계에 알려지게 된다.
윌리스-오버랜드는 전쟁이 끝난 후 군용 지프를 손질해 민간용 CJ-2A로 출시했다. 이 차는 탁월한 오프로드 성능으로 농촌 및 산간지역에서 큰 인기를 끌게 된다. 한편 윌리스-오버랜드는 1963년 카이저에 매각되고 카이저-지프로 회사명이 바뀌었다. 1970년 아메리카모터스(AMC), 1987년 크라이슬러를 거쳐 오늘날 FCA 산하의 주력 브랜드로 활약하고 있다.
JEEP, 75th Anniversary
올해는 지프가 탄생한 지 75주년이 되는 해다. SUV를 전문으로 생산하는 브랜드 중 가장 긴 역사를 자랑한다. 경쟁사인 랜드로버는 지프보다 8년 늦은 1947년 설립됐다. 랜드로버도 그렇지만 지프는 여러차례 주인이 바뀌는 힘든 세월을 겪었다. 하지만 FCA그룹의 일원이 된 후 안정적인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지프는 2014년 브랜드 최초로 세계 판매량이 100만대를 돌파했다. 지난해에는 123만7,538대를 팔아 2년연속 100만대 판매를 돌파했다.
지프는 램(RAM)과 함께 FCA그룹 내 주력 브랜드로 그룹을 이끄는 쌍두마차의 역할을 훌륭하게 해내고 있다. 물론 세계적으로 불고 있는 SUV 인기가 한몫을 했다. 국내에서의 활약도 눈부시다. 지프는 지난해 레니게이드의 활약에 힘입어 4,888대의 판매를 기록했다. 전년 대비 17.4% 늘어난 수치다. 이러한 상승세에 힘입어 FCA코리아는 올해 지프 판매목표를 6,000대로 잡았다(꿈은 크게 가질수록 좋은 것이다).
지프는 7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현행 모델에 새로운 색상과 배지, 휠 등을 추가한 75주년 기념모델을 출시했다.
기자는 75주년 기념모델들을 한발 먼저 시승하는 영광을 얻었다. 미국 모압 트레일에서 말이다.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최고의 코스가 될 것”이라는 FCA코리아 윤호선 차장의 말에 기대감이 부풀었다. 시승 코스는 고속도로 및 알처스 국립공원 내 트레일이고, 주어진 시간은 약 8시간이다.
이번 미디어 프로그램의 하이라이트는 지프의 75th 에디션 모델을 타고 모압 트레일을 달리는 것이다. 리조트를 출발해 알처스국립공원 내 여러 트레일을 돌고 리조트로 돌아오는 코스다. 왕복 200km 정도의 험난한 오프로드 구간이다. 점심식사와 휴식 시간을 포함해 8시간 정도가 걸렸다. 국내에 8시간을 즐길 수 있는 오프로드가 있을까? 미국 사람들은 진짜 복 받았다.
시차로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에서 아침을 챙겨먹고 오프로드 체험에 나섰다. 전날 웰컴 파티 때 조금 미적거린 관계로 한국팀은 남아 있던(?) 그랜드 체로키와 체로키를 배정받았다. 둘 다 75th 에디션이다.
기자는 그랜드 체로키를 타고 시승을 시작했다. 출발하기 전 트레일 가이(안전요원을 이렇게 불렀다)가 “주변경치가 예뻐도 적당히 두리번거리세요”라며 우스갯소리를 건넨다. ‘무슨 힘 빠지는 소리냐’는 생각이 들었지만 정말로 경치에 빠져들어 전방주시를 게을리하곤 했다. 고속도로를 지나 본격적인 오프로드 코스로 접어들었다. 그림 같은 풍경 속에서의 드라이브라니. 잠시 본분을 잊고 느긋하게 운전을 즐겼다.
시승한 그랜드 체로키는 V6 3.6L 가솔린 모델이다. 최고출력 295마력을 내고 변속기는 ZF 8단 자동이다. 가솔린 SUV는 국내에 흔하지 않은 탓인지 당연히 들려야 할 소음과 진동이 없어 조금 낯설었다. 부드러운 주행감각과 조용한 실내는 무척 인상적이었다. 간판모델답게 에어 서스펜션도 갖추고 있어 트레일에 맞게 높이를 조정해 편안히 달릴 수 있었다. 중간지점에서 체로키로 바꿔 탔다. 체로키 역시 휘발유 모델이다. 4기통 2.4L 엔진은 9단 자동변속기와 어울려 184마력, 23.6kg·m의 성능을 낸다. 국내에서는 만날 수 없는 모델이다. 먼저 탄 그랜드 체로키에 비해 힘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크게 다가왔다.
국내에서 타본 디젤 체로키는 초기에 최대토크가 나와 정차 후 출발할 때나 언덕을 만났을 때 힘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지만 가솔린 체로키는 rpm을 꽤 올려야 힘이 붙는다. rpm을 올리며 가속페달을 세게 밟으면 차가 튀어나가 적응하기까지 계속 꿀렁거렸다. 동승자에게 미안할 따름이었다.
체로키로 이동한 구간은 가장 험난한 코스였다. 등판각도 50도 정도 되는 바위를 타고 올라가 좌로 조향해 기울어진 상태로 암벽을 등반했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손에 땀이 맺힌다. 코스 진입을 기다리고 있는데 한국에 있는 가족과 여자친구 생각이 어찌나 나던지. 게다가 옆을 보면 천길 낭떠러지다(침 여러번 발랐다). 트레일 가이들의 지시를 받으며 조금씩 이동하는데 어라, 이게 된다. 그것도 아무런 문제 없이 말이다.
시승에 동원된 지프는 모두 순정상태로, 전혀 튜닝을 하지 않았다. 그럼 쉬운 코스로만 갔을까? 온몸이 왼쪽으로 쏠리는 걸 간신히 버티고 나오니 안도의 숨이 저절로 나왔다. 고개를 빼서 뒤를 보니 레니게이드도 똑같은 코스를 등판하고 있다.
도시형 콤팩트 SUV도 지프에서 만들면 저런 실력자가 된다. 이런 출중한 차들이 한국에서는 거의 온로드만 밟다가 생을 마감한다. 여기에는 못미치지만 국내에도 찾아보면 오프로드 코스가 꽤 있다. 지프를 보유하고 있는 독자라면 당장 떠나보길 바란다.
울퉁불퉁 길을 지나 탁 트인 공간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오후에는 같이 온 일본팀이 양보해줘 랭글러를 타볼 수 있었다. 랭글러 언리미티드 모델로, V6 3.6L 가솔린 엔진과 5단 자동변속기가 만나 285마력, 35.9kg·m의 힘을 낸다.
랭글러 시승은 처음이다. 운전석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고 차를 움직여본다. 랭글러의 느낌은 ‘날것’이다. 최소한의 전자장비, 운전에 꼭 필요한 것들로 간소하게 꾸며졌다. 오프로더답게, 장갑을 껴도 충분히 조작할 수 있도록 손이 닿는 것은 모두 큼지막하다.
가속페달의 반응이 상당히 느긋하고 차체도 높아 아주 큰 장애물이 아니면 그닥 신경 쓰지 않고 올라도 거뜬히 돌파했다. 랭글러가 오면 트레일 가이들도 별다른 지시 없이 혼자 가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만큼 어떤 길이든 잘 뚫고나갔다.
마지막 구간은 큰 바위산을 오르는 비교적 쉬운 코스로 이곳에서 국내에서 인기몰이 중인 레니게이드를 타 볼 수 있었다. 레니게이드는 인도팀이 선점하고 있었는데, 지프 본사 직원이 거의 빼앗다시피해서 차를 바꾸어주었다. 인도에는 아직 레니게이드가 출시되지 않았고, 한국 시장에서는 반응이 좋아 우선권을 준 것 같다. 이 자리를 빌려 인도팀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레니게이드 역시 가솔린 모델이다. I4 2.4L 엔진과 9단 자동변속기를 얹어 180마력 24.1kg·m을 낸다. 앞서 시승한 모델들보다 서스펜션이 굉장히 단단했다. 레니게이드를 단단하다고 느끼다니. (더 비싼)형들에 비해 승차감은 조금 불편하지만, 오프로드 돌파력은 형들 못지않게 야무졌다. 한국팀을 이끈 윤호선 차장은 레니게이드가 합류해서 그런지 코스가 지난해에 비해 상당히 쉽다고 한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험한 코스인지 짐작도 안간다.
오프로드 시승을 마치고 났더니 어깻죽지가 아파왔다. 숙소 앞 흔들의자에 앉아 어깨를 주무르고 있자니 오늘 경험했던 달리기와 멋진 광경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오픈카의 맛을 보겠다며 랭글러의 루프를 열어 젖히는 바람에 온몸이 먼지 투성이었지만, 즐겁고도 힘들었던 경험은 두고두고 생각날 것이다. 이 기억이 아니었다면 마감기간, 벌써 정신줄을 놓아 안드로메다로 날아가서 감자를 키우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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