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한 | 새로 태어난 킹스맨, 레인지로버 벨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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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흐르면서 변하는 것이 있다. 또한 시대가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 예로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번에 시승하는 자동차가 영국의 차인 만큼 ‘킹스맨’의 스타일을 예로 들어보면, 동일한 브리티시 수트를 입고 있음에도 서로 다른 디자인과 핏을 보여주는 두 명의 요원 ‘해리’와 ‘에그시’의 차이라고도 할 수 있다.
건장한 체격에 날이 선 듯한 수트를 입으면서 남성적인 매력을 발산하는 ‘해리’, 날렵하면서 약간 작은 체격에 부드러운 느낌의 수트를 입으면서 현대에 걸맞는 다소 중성적인 매력을 발산하는 ‘에그시’는 시대가 흐르면서 변한 매력을 보여준다. 둘은 수트와 매너, 일처리 방식에서는 차이를 보이고 ‘에그시’는 현대적인 느낌을 살리고 있지만 공통된 영국의 스타일과 매너에 관한 한 가지 중심점으로 킹스맨의 변하지 않는 매력을 보여준다.
올해 초, 서울모터쇼 현장에 전시되어 있던 레인지로버 벨라를 봤을 때 기자가 느꼈던 것이 ‘현대적인 디자인으로 변하는 레인지로버’였고, 해리와 에그시를 번갈아 봤을 때의 그것이었다. 이전부터 랜드로버의 다른 모델들에서 사용했던 직선에 기조한 디자인은 그대로이고 헤드램프와 테일램프를 바라보기만 해도 랜드로버의 모델임을 한 눈에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풍기는 분위기는 레인지로버 이보크보다도 훨씬 젊어졌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디자인의 변화와 새로운 기술을 적용한 엔진 그리고 프레임에도 불구하고 이어지는 것은 랜드로버 특유의 주행 능력이다. 돌이켜보면 랜드로버의 모델들은 모두 탁월한 주행 능력을 갖고 있고, 그것은 벨라도 마찬가지다. 도심 속에서 심플함의 미를 풍기면서도 언제든지 거친 임도로 뛰어들 수 있는 능력은 마치 깔끔한 수트 속에 언제든지 적과 싸울 수 있는 근육과 무기를 숨긴 킹스맨을 떠올리게 한다. 둘 다 영국 출신이기에 더 어울리는 지도 모르겠다.
벨라는 사진으로 보는 차체와 실제로 보는 차체의 느낌이 크게 차이가 난다. 사진 상으로는 잘 느껴지지 않겠지만 약 2m 정도 떨어진 상태에서 벨라를 살펴보면 예상 외로 커 보이는 차체에 놀라게 된다. 전장 4,803mm, 전폭 1,930mm에 달하니 큰 차체인 것은 머리로 알고 있지만, 사진 상으로는 상당히 날렵해 보이기에 실제로 봤을 때 느껴지는 약간 육중한 차체의 감각과 괴리가 있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면 그런 느낌은 어느 정도 사라지는데, 주로 보게 되는 부분이 프론트 그릴부터 윈도우 라인이 되기 때문이다.
사진 상으로도 차체에 비해 작은 느낌의 프론트 그릴과 헤드램프, 테일램프는 실제로 바라보면 더 작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랜드로버만의 독특한 LED DRL 형상으로 확실하게 디자인의 포인트로 자리잡고 있으며, 램프의 기능은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프론트 범퍼 하단의 에어 인테이크와 펜더, 앞 문이 이어지는 곳에는 브론즈 색상을 적용해 포인트를 주고 있다. 필러와 루프에 검은색을 적용해 다소 날렵한 느낌을 부여하는 것은 이보크 시절부터 이어지는 랜드로버의 색상 조합법이다.
벨라는 심플하면서도 날렵한 이미지를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경쟁사의 SUV들이 쿠페형 스타일을 SUV에 접목하면서 날렵함을 강조하는 데 비해 벨라는 기교 대신 정직하게 직선의 루프라인을 적용하고 있다. 벨라가 날렵함의 마술을 부린 곳은 루프가 아닌 하단으로, 뒤로 갈수록 벨트라인을 높인 것은 물론 범퍼 하단을 극단적으로 높게 세워 차체의 끝단을 치켜올렸다. 임도에서의 탈출 각도를 확보하면서 날렵함을 추구하는 것이 랜드로버 스타일 이라고 할 수 있다.
심플함에 점을 찍는 부분은 도어 손잡이다. 평상시 그리고 주행 중에는 차체에 알맞게 수납되는 손잡이는 도어를 열기 위해 잠금을 해제하면 쥐기 편하도록 솟아오른다. 이런 타입에 흔히 사용하는 지렛대 형태의 도어 손잡이와는 다르게 전체적으로 솟아오르기 때문에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열기 편하다. 벨라 디자인에 신경을 쓴 부분이 많다는 것이 바로 느껴진다.
외형에서 보여줬던 심플함이 벨라의 실내에도 그대로 녹아 있다. 약간 돌출된 계기반을 제외하고는 직선으로 구성되어 있는 대시보드에 가로로 긴 형태의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이 있는 센터페시아 중단까지는 스타트 버튼을 제외하면 물리 버튼을 찾을 수 없기에 더욱 더 그렇다. 그 하단에 있는 물리 버튼도 단 세 개, 모드에 따라 기능을 빠르게 제어하기 위한 두 개의 큰 다이얼과 음량 조절을 위한 한 개의 작은 다이얼뿐이다. TCS 오프, HDC 등 주요 기능도 물리 버튼이 아닌 터치로 구현하고 있다.
시동을 끄고 있을 때는 그저 검은색의 패널인 이 부분은 시동을 거는 순간 기본적으로 차량의 주행 모드 등을 제어하는 패널로 바뀌며 기능 선택에 따라 이 화면에서 에어컨 조절, 카오디오 기능의 간단 조절을 사용할 수 있다. 랜드로버는 이 부분을 터치 프로 듀오(Touch Pro Duo)라고 부르는데, 본래대로라면 수많은 물리 버튼이 있어야 하는 부분을 한 조각의 화면으로 간단하면서도 깔끔하게 구현할 수 있다. 대신 단점도 있는데, 주행 중 기어조작 등을 위해 화면을 보지 않고 무심코 손을 뻗었을 때 화면의 다른 기능을 눌러버리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재규어 XJ부터 적용된 디지털 계기반은 이제 익숙해졌지만, 새로 만든 스티어링 휠 주변의 버튼들은 약간 누르기 힘든 면이 있다. 오른쪽의 크루즈 컨트롤 버튼은 간단하게 조작되지만, 왼쪽에 몰려있는 오디오 또는 계기반의 메뉴를 조작하는 버튼은 몇 번을 눌러도 조작감이 명확하지 않다. 시승하는 짧은 기간동안만 조작해서 그런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에 이 부분은 벨라를 장기간 소유하고 있는 오너의 의견이 필요하다.
시트는 단단함보다는 부드러움을 중시하는 타입으로 1열 시트를 최대한 낮춰도 SUV답게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듯한 시야를 확보해 준다. 상대적으로 윈도우가 작음에도 불구하고 답답함은 느껴지지 않는 편이며, 헤드룸에도 여유가 있다. 루프 라인이 직선으로 뻗어있기 때문에 2열에서도 헤드룸에 여유가 있고 등받이도 편안함을 제공한다. 트렁크 용량은 558L로 아기를 둔 부모들에게 인기가 있는 스토케 익스플로리 유모차를 싣고도 큰 가방 하나를 더 실을 공간이 남는다.
벨라는 등급에 따라 각각 2.0L, 3.0L 가솔린 그리고 디젤 엔진을 탑재한다. 시승차는 3.0L 디젤 엔진을 탑재해 4,000rpm에서 최고출력 300마력, 1,500~1,750rpm에서 최대토크 71.4kg-m을 발휘한다. 변속기는 ZF에서 공급받는 8단 자동변속기이며 랜드로버의 SUV답게 4륜구동 방식이다.
엔진 출력과 낮은 rpm에서 발휘되는 토크 등 데이터를 살펴보면 가속 페달을 약간만 밟아도 넉넉한 토크로 발진할 것 같지만, 실제 발진 감각은 낮은 rpm에서 답답한 면이 있다. 수치와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경쾌한 발진을 원한다면 2,000rpm 이상을 사용해야 한다. 주행 모드가 컴포트 모드라서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스포츠 모드로 변환해도 도심에서의 저속 주행에서 큰 차이는 느껴지지 않는다.
대신 30km/h를 돌파하는 시점에서의 가속은 만족스럽다. 고급 SUV라는 벨라의 특성 상 가속 페달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스포츠 감각은 추구하지 않지만, 고속 영역까지의 진입과 이를 넘어서 초고속 영역에 진입하기 전까지 주행하는 데 있어 출력의 부족을 느낄 일은 거의 없다. 엔진 회전을 높여도 그르렁거리는 엔진음은 실내로 아주 낮게 유입되고, 편안한 시트와 어우러져 주행의 편안함을 보장한다.
벨라는 재규어 F 페이스와 동일한 프레임을 사용하고 3.0L 디젤 엔진도 동일하게 사용하지만 그 주행 느낌은 전적으로 다르다. F 페이스가 스포츠카에 가까운 주행 느낌을 갖고 있다면, 벨라는 세단에 가까운 느낌으로 이안 칼럼이 디자인하기 이전의 원형 헤드램프를 갖췄던 재규어 XJ와 주행 감각이 닮았다. 시트 포지션이라든지 세세한 부분은 다르지만, 크게 이야기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앞 더블 위시본, 뒤 인테그럴 링크 방식의 서스펜션은 코너에서 단단함과 부드러움의 중간적인 느낌을 제공한다. 움직임에 여유가 거의 없는, 스포츠카에 주로 적용되는 단단한 서스펜션은 아니기 때문에 승차감이 보장되고, 하중 이동이 어느 정도 느껴지면서 잡아주기 때문에 차체 움직임의 특성을 몰라도 불안감은 없다. 단단함을 10단계로 나눈다면 대략 7.5 정도에 위치한다는 느낌이다.
이와 같은 차분함과 약간의 여유로움은 임도 주행에서도 마찬가지다. 아쉽게도 처음에 목표로 삼았던 전차 훈련장 주행은 할 수 없었지만, 랜드로버 특유의 명물인 인공 급경사를 쉽게 올랐다가 HDC를 이용해 부드럽게 내려오는 경험을 하고 나면 특유의 주행 능력에 감탄하게 된다. 극단적으로는 앞바퀴와 뒷바퀴가 각각 하나씩만 지면에 붙어 있어도 주행할 수 있으니, 벨라의 임도 주행 능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SUV가 도심을 달리는 시대가 되고 승차감을 중시하게 되어도, 임도를 가볍게 돌파하는 랜드로버의 정체성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최근 출시되는 자동차들이 다양한 ADAS 장비를 적용하고 있지만, 벨라는 이 점에 대해서는 약간 인색한 느낌이다. 긴급 제동 시스템이 적용되어 있고 소리와 시각을 통해 앞 차와의 충돌 경고도 마련하고 있지만, 평범한 크루즈 컨트롤만 적용되어 있고 차선 유지 시스템이 아닌 이탈 경고 시스템만 적용되어 있다. 랜드로버도 자체적으로 자율주행 시스템을 개발하고 있고 그 완성도가 높기 때문에 약간은 아쉬운 부분이다. 아직까지는 운전자가 똑바로 운전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벨라는 이보크와 레인지로버 스포츠 사이를 담당하는 미들급 프리미엄 SUV다. 시대가 변하고 있는 만큼 새로운 디자인 언어를 갖추고 태어났지만 자신들의 정체성은 버리지 않았고, 변한 디자인 속에서도 랜드로버라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그런 점은 시대에 맞춰 변화하면서도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와 영국의 신사라는 정체성을 유지하는 킹스맨과도 닮아 있다. 그렇게 변화하고 있기에 지금까지도 랜드로버, 아니 레인지로버의 이름이 유지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대표적인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변화한다는 것, 변화했음에도 한 눈에 정체성을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은 상당히 어렵지만, 벨라는 적어도 그런 변화를 성공적으로 해낸 것 같다. 작지도, 너무 크지도 않은 랜드로버의 고급 SUV를 원한다면 벨라가 최상의 선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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