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한 | 무난한 기동전사, 혼다 시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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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다 시빅은 다양한 얼굴과 인상을 갖고 있는 자동차다. 대부분의 운전자들은 어코드 이후 저렴한 가격을 무기로 한 때 국내 수입 준중형 시장을 점령했던 8세대 시빅 세단을 떠올릴 것이고 역동적인 주행에 관심이 있다면 시빅을 고성능 머신으로 다듬어 낸 시빅 타입 R이 먼저 생각날 것이다. 지금처럼 터보차저 엔진이 흔하게 보급되지 않던 시절, 시빅이 탑재하고 있는 VTEC 엔진은 고성능을 상징하는 명기였고 엔진 회전이 상승하면서 전달되는 독특한 감각으로 운전자를 사로잡았었다.
고성능 모델인 타입 R 또는 si 모델을 쉽게 접할 수 없는 국내에서 처음 수입된 8세대 모델만으로도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속도계와 회전계를 상하로 나눈 독특한 계기반과 잡기 쉬운 스티어링 휠로 인해 다루기 편하면서도 성능도 일정 수준 이상의 만족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9세대 모델에서는 실망이 꽤 컸는데, 8세대 모델보다 언더스티어가 심해져서 스포츠 주행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혼다가 초심을 잃었다는 생각이 강하게 전해지던 순간이었다.
새로 태어난 10세대 시빅에서 제일 궁금한 점은 명확하다. 9세대 모델처럼 편안함을 위해 역동성을 완전히 포기했는가, 아니면 과거처럼 역동성을 다시 강조해 가고 있는가이다. 새로운 플랫폼을 적용하고 기존 모델과는 전혀 다른, 역동적인 디자인으로 다시 태어난 시빅은 과연 그 디자인만큼 인상적인 주행 감각을 남겨줄 수 있을까? 눈앞에 있는 시빅이 해치백이 아니라 세단 모델이라는 점이 아쉽지만, 전체적인 판단은 성능 이후로 미뤄두고 시빅의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본다.
9세대 어코드 페이스리프트 때부터 변화의 조짐은 있었지만, 10세대 시빅 역시 전면의 디자인을 통해 미래지향적인 이미지를 강조하고 있다. 특히 프론트 그릴부터 양쪽 헤드램프 상단까지 이어지는 굵은 크롬 라인은 전투용 로봇의 머리에 달려 있는 뿔을, 날카로운 디자인의 헤드램프는 로봇의 빛나는 눈을 연상시킨다. 혼다 내에 로봇 애니메이션을 상당히 좋아하는 디자이너가 있다는 느낌이 드는데, 이러한 과감한 디자인은 최근 일본 자동차 디자인의 추세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자동차를 구매하지 않는 젊은이들이 늘어나는 작금의 상황과도 큰 연관이 있을 것이다. 디지털에 빠져 있는 젊은이들에게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는 애니메이션의 디자인을 자동차에 적용해 구매 욕구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혼다가 일본 내에서 아이들이 즐겨보는 ‘가면라이더’ 시리즈에 지속적으로 자사의 모터사이클과 자동차를 등장시키는 이유를 생각해보면 이러한 디자인도 쉽게 납득이 된다.
이러한 미래지향적이면서 디지털적인 디자인은 차체의 측면을 지나 후면까지 이어진다. 세단이면서도 쿠페와 비슷한 레이아웃을 가지고 있고, 측면에는 펜더와 공기가 흐르는 라인을 강조하는 강한 캐릭터라인이 그려지고 있다. 후면에 위치한 C자 형태의 테일램프는 이 차가 시빅임을 드러내면서 강인한 이미지를 같이 만들어내고 있다. 브레이크 램프 동작 시 시인성이 좋아지는 것은 덤이다.
외형에서는 미래지향적인 이미지를 추구하고 있지만, 실내에서는 그런 분위기를 찾기가 힘든 면이 있다. 그래도 자세히 보면 대시보드와 계기반의 디자인 등 각 부분이 모두 각을 이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를 통해서 강한 인상을 남기고자 하는 것으로 예상된다. 단지 그러한 노력에 비해 센터페시아 하단과 센터터널의 디자인이 심심하다는 점은 약간 마이너스로 다가온다.
3 스포크 스티어링 휠은 신형 CR-V와 마찬가지로 버튼류들이 작고 투명한 형태로 바뀌었다. 계기반은 디지털 방식으로 좌우의 수온계와 연료계도 칸으로 나누어진 게이지를 적용하고 있다. CR-V와는 달리 회전계가 원형으로 구성된 점은 시빅의 고성능 모델을 의식한 디자인으로 추정된다. 센터페시아가 운전자쪽으로 약간 기울었던 기존 모델에 비해 평평하게 다듬어진 점은 신형 시빅이 지향하는 바를 말해준다.
센터페시아 중앙의 LCD 화면은 네비게이션과 애플 카플레이 등 다양한 기능을 충실히 담고 있지만 크기가 작은 것이 아쉬운 점으로 다가온다. 그 아래 위치한 에어컨 조작 스위치와 센터터널은 자로 재고 그은 듯 직선으로 구성되어 있고, 기어노브도 일자로 조작하도록 되어 있다. 미국을 주 무대로 하는 차답게 대형 컵홀더와 수납공간을 갖추고 있고, 센터터널 아래에도 약간의 수납공간이 마련되어 소지품을 보이지 않게 수납할 수 있다.
1열 시트는 역동성과 상체 지지성보다는 안락함이 조금 더 강조되어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코너에서 상체가 마구 흔들릴 정도는 아니다. 쿠페라이크 스타일임을 고려하면 뒷좌석도 의외로 편안한데, 머리 공간에 약간에 여유가 있다는 점이 놀랍다. 그만큼 탑승 인원에 대해서 많은 신경을 썼다는 증거일 것이다. 세단의 특성 상 트렁크 입구는 좁은 편이지만, 화물 적재 공간은 의외로 넓다.
시빅은 등급에 따라 다양한 엔진을 탑재한다. 이번에 국내에 수입되는 모델은 2.0L 자연흡기 i-VTEC 엔진을 탑재한 모델로 6,500 rpm에서 최고출력 158마력, 4,200 rpm에서 최대토크 19.1kg-m을 발휘한다. 좀 더 출력이 높으면서도 효율이 좋은 1.5L 터보차저 엔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격적 문제로 인해 자연흡기 엔진을 선택했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준중형 세단이라고 하면 1.6L 이하의 엔진이 적용되어야 세금과 유지에서 유리하다는 면도 있기 때문에 상당히 아쉬운 부분이기도 하다.
변속기는 CVT를 적용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변속기의 특성도 있지만 인위적인 기어비 적용 등이 거의 없기 때문에 역동성을 크게 강조하지는 못한다. 단지 엔진 회전을 높게 사용하면 6,500rpm 즈음에서 살짝 회전을 떨어뜨렸다가 다시 상승시키는데, 여기에서 약간 스포티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스포츠 모드를 따로 설정할 수 있는 어코드와 달리 시빅에는 에코 모드만 있다는 것도 고려해야 하는 부분이다.
따라서 가속에서 큰 재미는 없다. 역동성보다는 무난함을 강조하는 스타일로 전 회전 영역에 걸쳐 골고루 힘이 분배되는 그런 느낌이다. 물론 최대출력과 최대토크가 발휘되는 지점이 있지만, 굳이 회전을 높게 가져갈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수동 모드가 없어서 VTEC이 본격적으로 작동되는 시점을 바로 느낄 수 없다는 점은 아쉽지만 고회전 영역에서는 출력이 잠시 상승하는 기분을 즐길 수 있다.
프론트 맥퍼슨 스트럿, 리어 멀티링크 방식의 서스펜션은 코너링에서 예리함보다는 부드러움을 강조한다. 그러면서도 라인은 거의 정확히 그려나가는데, 언더스티어가 심했던 기존 모델을 생각해보면 이런 변화는 반갑다고 할 수 있다. 단지 코너링 위에 승차감을 더했다기 보다는 승차감 위에 코너링을 얹은 느낌이라 적극적인 와인딩 공략의 재미는 기대하기 힘들다. 이는 차체나 서스펜션의 구조보다는 서스펜션의 상하 움직임 조절 세팅으로 인한 것으로 보이는데, 스포츠 모델인 시빅 si나 타입 R에 대한 기대가 커지는 순간이다.
고속 영역에서의 움직임까지는 안정적이지만, 초고속 영역으로 진입하면 불안함이 조금씩 다가온다. 시빅이 이제 더 이상 작은 차체를 가진 자동차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런데다가 초고속 영역에서의 급제동 시 차체가 약간 흐트러지기도 한다. 물론 운전자가 의식하고 있다면 자세를 잡을 수 있을 것이고 이 차로 초고속 영역에 진입할 운전자도 거의 없겠지만 말이다. 안전장비는 언덕길 밀림 방지, 오토홀드 외에는 거의 없다고 봐도 좋다. 대신 차체 내에서 충격을 효율적으로 흡수하는 에이스 바디가 적용되어 있다.
신형 시빅은 이전 모델과는 달라졌고, 역동성을 조금은 더 추구하게 되었다. 그리고 파격적인 디자인에 안정성을 얹어 젊은이들이 무난하게 운전할 수 있는 자동차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너무 무난한 모델을 수입한 것이 아닌가’라는 점이다. 게다가 시빅이 국내에 처음 수입되던 시절과는 다르게 지금은 시빅의 경쟁 모델들이 너무나 높은 경쟁력을 갖춰버렸다. 그런 상황 속에서 시빅은 어떤 방식으로 국내 시장을 공략해 나갈 수 있을 지가 주목된다. 세상은 과연 무난함에 주목할 것인지, 거기에 시빅의 판매량에 대한 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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