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건과 모터사이클이 GT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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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T 혹은 그랜드 투어러는 우리에게 낯선 단어가 아니다. 본래 GT는 장거리 운전을 목적으로 설계된 고성능 자동차다. 그만큼 먼 거리를 빠르고 안락하게 달릴 수 있다. 차체는 매끈한 스포츠카나 쿠페 디자인이 대부분이고 편안한 실내공간과 적당한 트렁크를 갖췄다. 최근 들어 장거리 운전을 위한 고성능차가 아니더라도 GT라는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많다. 이유는 단 하나. GT가 고성능을 상징하는 차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비주류인 왜건과 모터사이클도 GT 영역에 포함시킬 수 있을까? 아우디 A6 아반트와 KTM 1290 슈퍼 듀크 GT를 보면 그래도 될 것 같다(A6 아반트는 본지가 시승을 진행한 뒤 환경부의 차량인증 취소처분으로 판매가 중단됐지만 왜건과 GT의 특징을 갖춘 대표적인 차이기에 이 자리에 나왔다).
이유는 이렇다. 일단 A6 아반트는 생김새가 GT답다. GT라는 타이틀을 얻기 위해서는 ‘장거리를 편안하게 달리는 고성능차’라는 조건 외에 멋진 디자인도 포함된다. A6 아반트가 딱 그런 차다. 왜건인데도 디자인이 우아하고 스포티하다. 5m에 이르는 긴 차체가 부담스러울 법한데 특유의 매끈한 실루엣 덕분에 그런 느낌이 들지 않는다. B필러 부근에서 정점을 찍은 뒤 D필러까지 완만하게 떨어지는 루프 라인은 쿠페만큼이나 역동적이다. 그린하우스도 뒤로 갈수록 좁아져 루프 라인이 날렵해 보인다. 점점 이상해지고 있는 아우디 SUV를 보다가 A6 아반트를 보면 아우디 왜건이 얼마나 멋진지 새삼 깨닫게 된다.
왜건이지만 전혀 둔해 보이지 않는다. 실물을 보면 늘씬하다
성능 수치를 보면 A6 아반트를 GT에 넣어야 할지 고민이 되기도 한다. 최고출력 190마력, 최대토크 40.8kg·m인 2.0L 터보 디젤 엔진에 7단 듀얼클러치, 상시네바퀴굴림인 콰트로를 쓰는 평범한 구성이다. 하지만 차를 타보기도 전에 평가하는 일은 금물. 고민은 나중에 해도 된다.
KTM 1290 슈퍼 듀크 GT는 이름부터 대놓고 GT임을 내세운다. 디자인만 보고도 GT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을 만큼 화려하고 안락해 보인다. 1290 슈퍼 듀크 GT는 고성능 네이키드 1290 슈퍼 듀크 R을 바탕으로 한 스포츠 투어러다. 속을 드러낸 네이키드에 장거리 운전에 어울리는 디자인과 장비를 더해 한눈에 GT라는 티가 팍팍 난다. 높이조절식 윈드스크린을 시작으로 23L로 커진 연료탱크와 라디에이터를 감싼 근육질의 슈라우드, 양쪽에 달린 30L 용량의 커다란 순정 사이드케이스(옵션)가 그 예다. 1290 슈퍼 듀크 R과 달리 핸들바가 시트 쪽으로 좀더 당겨져 어드벤처 모터사이클을 탈 때처럼 상체를 바짝 세운 자세가 나온다. 장시간 주행해도 편안한, GT라는 이름에 딱 어울리는 라이딩 자세다.
KTM 1290 슈퍼 듀크 GT는 디자인만 보고도 GT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을 만큼 화려하고 안락해 보인다
엔진 스펙은 고성능을 충족시키고도 남는다. V 트윈방식 1,301cc 엔진은 최고출력 173마력, 최대토크 14.7kg·m로 동급 최고 수준이다. 0→100km/h 가속성능은 단 2.7초, 제원상 최고속도는 300km/h 이상이다.
왜건과 모터사이클이라는 명확한 장르와 몇가지 요소 때문에 A6 아반트와 1290 슈퍼 듀크 GT를 GT로 분류할 수 있을지 망설이게 되지만 일단 달리기 시작하면 둘 다 완벽한 GT라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A6 아반트는 생각보다 훨씬 잘 달리고 편하다. 가솔린 엔진만큼 정숙한 2.0L 터보 디젤 엔진은 1,550kg의 차체를 끌기에 충분하다. 회전수가 1,750rpm 언저리까지 올라가기 전에는 지체현상이 도드라지지만 그 시점을 지나면 거침이 없다. 운전석 뒤쪽으로 한참 긴 공간이 있다는 사실을 잊을 정도로 몸놀림이 가볍다.
그리고 빠르다. 법적 허용속도까지는 쉽게 오르내리고 그 이상도 가능하다. 배기량이 3.0L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기도 한다. 이럴 때는 변속기를 스포츠 모드에 맞추도록 하자. 아니면 드라이브 셀렉트를 다이내믹 모드에 두는 방법도 있다. 그러면 A6 아반트에 활기가 더해지고 배기량의 한계를 잊게 된다. 이제 목적지까지 냅다 달리기만 하면 된다. 그 과정이 아주 편하다.
A6 아반트는 장거리 운전에 유용한 장비를 대거 갖췄다
A6 아반트에 적용된 장비는 장거리 운전에 유용한 것들이다. 무더운 여름날 땀을 식혀줄 통풍시트와 4존 공조장치를 시작으로 운전 피로를 줄이는 어댑티브 크루즈 컨트롤, 안전을 위한 액티브 레인 어시스트, 아우디 프리센스 등이 더해졌다. 거짓말 좀 보태서 모든 안전장비를 켜고 어댑티브 크루즈 컨트롤만 맞춰 놓는다면, 스티어링 휠을 살짝살짝 조작하기만 해도 목적지까지 갈 수 있다. A6 아반트는 그 정도로 편하고 믿음직스럽다.
A6 아반트의 또 다른 장점은 왜건이 아니면 기대할 수 없는 엄청난 적재공간이다. 기본 565L이고 뒷좌석을 눕히면 1,680L로 늘어난다. 많은 짐을 싣고 먼 길을 빠르게 그리고 편하게 가고자 한다면 적어도 국내에서는 A6 아반트를 따를 차가 없다.
장보기는 기본, 이사까지 해낼 수 있다. 과장이 심했나? 트렁크가 너무 커서 뒷좌석을 접기 어렵다. 그래서 레버(붉은 박스 사진)가 꼭 필요하다
모터사이클 쪽으로 시야를 돌리면 또 다른 가능성이 생긴다. 많은 짐을 싣고 먼 거리를 달릴 수 있는 모터사이클은 많지만 ‘빠르게, 그리고 편하게’라는 조건을 더하면 범위가 확 줄어든다. 그리고 결과는 1290 슈퍼 듀크 GT로 압축된다.
1290 슈퍼 듀크 GT를 GT로 볼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무지막지하게 빠르고 편하기 때문이다. 빨리 달리고 편한 모터사이클은 많지만 슈퍼 듀크 GT처럼 빠름과 편함의 양극단을 자유롭게 오가는 모델은 본 적이 없다.
무릎 사이에서 느껴지는 V 트윈 엔진의 묵직한 토크는 차원이 다른 가속감을 제공한다. 자동차에서는 당연히 느낄 수 없는 것이고 오버리터급 모터사이클에서도 흔치 않은 폭발력이다. 레인·스트리트·스포츠 세가지 주행 모드 중 어디에 맞춰도 눈 깜짝할 사이에 100km/h를 돌파해 속도계의 앞자리 숫자가 2를 가리키고 있다. 상상할 수 없는 빠르기다.
그런데 더 상상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숫자 100과 200을 쉽사리 넘나드는데도 불안함이나 피곤함이 전혀 없다면 믿겠는가? 슈퍼 듀크 GT는 실제로 그것이 가능하다. 정지상태에서는 200kg이 넘는 무게와 조금 높은 시트가 부담스러운데 출발한 뒤에는 모든 것이 편안할 뿐이다. 여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보기에는 큰 효과를 발휘하지 않을 것 같은 윈드스크린과 슈라우드가 주행풍을 최소화해 빠른 속도로 장시간을 달려도 전혀 피곤하지 않다(여기에는 꼿꼿한 라이딩 자세도 한몫한다).
현존하는 가장 강력한 엔진 중 하나다. 주행 모드는 세 가지
또 다른 이유는 운전자가 할 일이 별로 없다는 점이다. 출발할 때 왼손으로 클러치 레버를 놓은 다음 오른손으로 스로틀을 감고 왼발로 변속을 하면 된다. 코너를 만나면 브레이크를 가볍게 잡고(동시에 왼발로 기어를 내리고) 자연스럽게 시선을 바꾸며 엉덩이를 움직여 무게중심을 옮긴다. 그러면 슈퍼 듀크 GT가 모든 것을 알아서 한다. 그 밑바탕에는 퀵 시프터와 트랙션 컨트롤, 주행안전장치, 가변 댐퍼와 같은 첨단기술이 깔려 있다.
왼쪽 발목을 움직이는 것만으로 변속기 가능한 퀵 시프터는 왼손의 부담과 피로를 줄여준다. 버튼으로 바꿀 수 있는 주행 모드나 서스펜션 댐퍼는 여유로운 달리기부터 스포츠 라이딩까지 다양한 영역을 커버한다. 트랙션 컨트롤과 주행안전장치는 170마력이 넘는 슈퍼 듀크 GT의 힘을 공포감 없이 쉽게 다스릴 수 있도록 이끈다.
(좌) 단순히 멋을 위한 디자인이 아니다. 고속에서 바람을 가르는 능력이 뛰어나다 (우) 풀 페이스 헬멧쯤은 너끈히 들어가는 사이드케이스
A6 아반트와 마찬가지로 많은 짐을 싣고 빠르게 달릴 수 있다는 점도 슈퍼 듀크 GT의 커다란 장점이다. 두개의 사이드케이스는 풀 페이스 헬멧이 너끈히 들어갈 정도로 넉넉하지만 전혀 거추장스럽지 않다. 사이드케이스를 단 다른 모터사이클처럼 최고속도 제한이 없어서 좋다. 보통 180km/h 정도를 권장하는데 슈퍼 듀크 GT에는 그런 게 없다.
1290 슈퍼 듀크 GT에 타면 누구라도 먼 거리를 빠르고 편안하게 달릴 수 있다. 초보자는 첨단기술의 힘을 빌려 편하게 달리고, 베테랑은 170마력이 넘는 고성능을 즐기면 된다. 사이드케이스에 한가득 짐을 싣고서 말이다.
A6 아반트와 1290 슈퍼 듀크 GT는 빠르게 달린다. 한쪽은 최고속도에 도달하는 시간과 과정이 점진적이지만 빠르게 지치지 않고 오래 달릴 수 있다. 다른 쪽은 말 그대로 빠르다. 사람에 따라서는 두렵다고 느낄 정도지만 둘 다 안락하고 편안하다. 여행에 필요한 짐을 싣고 첨단기술의 도움을 받으며 즐겁게 달릴 수 있다. 표현법은 다르지만 둘 다 GT의 조건에 부합하는 모습을 갖췄다. 이제 왜건과 모터사이클도 GT로 인정해야 할 때가 됐다. 기술과 환경이 바뀌고 사람들의 인식이 달라지면 처음에 세운 원칙이나 기준도 바뀌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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