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승기] 이탈리아에서 만난 피아트 500..."콩깍지가 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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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트 500으로 9박 10일 동안 약 2000km 달렸다. 제네바 모터쇼 프레스데이 기간에는 거의 차를 몰지 않았으니, 하루에 300km 정도를 달린 셈이다. 두가티와 람보르기니의 고향 이탈리아 볼로냐를 시작으로 페라리의 성지 마라넬로와 모데나 등을 누볐다. 또 피아트의 본사가 위치한 토리노를 거쳐, 몽블랑 터널을 통과해 스위스 제네바까지 갔다.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오는 길에는 슛돌이가 본격적인 선수 생활을 시작한 제노바를 들리기도 했다.
길고 길었던 여정. 단기간에 장거리 시승을 하다보니 500과 애증 가득한 사이가 됐다. 이젠 길에서 500을 보기만 해도 무척 반갑고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하지만 또 다시 이런 장거리 이동을 위해 차를 고른다면, 선뜻 500을 선택하긴 어려울 것 같다. 마치 헤어진 여자친구가 그립긴 하나 다시 사귀긴 싫듯.
# 우연한 만남
500을 탈 생각은 전혀 없었다. 예산이 풍족했던 것은 아니지만, 충분히 중형차까진 렌탈할 여유가 있었다. 중요한건 차종. 1차 지명은 i20 쿠페나 씨드 GT 등과 같은 유럽에서만 판매되는 국산차. 2차 지명은 국내에 출시를 앞둔 차. 3차 지명은 유럽에서만 탈 수 있는 차.
이걸로 며칠을 고민했다. 컨텐츠를 만드는 것도 목적이지만, 일단 장거리 이동의 피로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선택한 차는 폭스바겐 업!. 업!은 괜한 소문으로 국내 출시 계획도 없으면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차다. 개인적으로 궁금하기도 했고, 사람들의 관심도 많겠다 싶었다.
저렴한 렌터카 업체의 공통점은 예약과 다른 차를 받게되는 일이 다반사라는 것. 결국 난 업!을 받지 못했다. 고장 나서 수리 맡겼다고 한다. 이런 경우엔 가끔 추가 요금없이 상급 차종으로 주기도 하는데, 볼로냐 공항 렌터카 업체 직원은 내 의사와 상관없이 500의 키를 건넸다. 친퀘첸토? 격양된 말투로 되물으니 500이 최고란다. 자기도 500을 타고 있다며 엄지손가락을 세웠다. 렌터카 픽업 주차장에 오니 온통 500 천지였다. 애초부터 업!은 없었을 수도 있다. 이탈리아에 왔으니 피아트를 타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이럴줄 알았으면 국내 출시 예정인 500L을 탈걸 하는 후회도 들었다.
# 계속되는 반전
출장이 결정되고 가장 먼저 한일은 차량용 스마트폰 거치대와 AUX 케이블을 구입하는 것이었다. 가끔 영어가 지원이 안되는 차도 있고, 복잡한 메뉴 속으로 들어가 언어를 바꾸는 것도 쉽지 않은 경우가 많다. 해외에선 스마트폰을 이용한 내비게이션 사용이 가장 현명하다. 고독한 여정에서 음악을 듣는 것은 필수다. 유일하게 한국말을 듣게 되는 순간이며, 지루함을 달래기엔 이보다 좋은게 없다.
블루투스는 물론이고 USB 조차 기대 안했다. 그래서 보조 배터리를 한가득 챙겼는데, 가장 저렴한 트림의 500 렌터카 임에도 USB가 달렸다. 만세. 더욱이 연결하자마자 노래가 흘러나온다. 화려한 디스플레이는 없어도 엔터테인먼트 시스템은 기능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었다. 시작이 좋다.
트렁크엔 대형 캐리어와 백팩이 문제 없기 실렸다. 캐리어를 두개 넣기엔 조금 버거워보였다. 뒷좌석을 접으면 충분히 가능하겠다. 뒷좌석 공간은 예상대로 좁다. 누굴 태우는 것 자체가 민폐나 다름없다. 좁은 것은 둘째치고 뒷좌석으로 들어가는 것부터 만만치 않다.
이런 저런 세팅을 끝낸 후 시동을 걸었다. 어떠한 박력도 느껴지지 않고, 불규칙한 진동이 몸을 흔들었다. 그래도 이정도는 예상 범위에 있던 내용. 예상 밖이었던 상황은 자동변속기. 업!을 수동변속기로 예약한터라 당연히 500도 수동변속기일거라 생각했는데, 굉장히 친숙한 모습의 자동변속기가 놓였다.
시승한 500의 변속기는 5단 듀얼로직 변속기. 이 변속기는 푸조 MCP 변속기와 같은 개념이다. 자동으로 변속되지만 구조나 느낌은 수동변속기에 더 가깝다. 운전자의 적극적인 변속 조작에서 더 빛을 보는 자동변속기다. 이 변속기는 USB 연결단자와 함께 이번 출장에서 가장 큰 도움을 준 장본인이기도 하다.
# 자동으로 변속되는 수동변속기
수동변속기의 멸종을 아쉬워하는 마니아들은 클러치 조작과 기어 조작의 손맛을 사랑한다. 듀얼로직 변속기는 그 재미를 그대로 맛볼 수 있다.
오토모드에서는 그야말로 가속페달만 밟으면 된다. 대신 변속 시점마다 무언가 뒷덜미를 잡아당긴다. 울컥울컥. 속도를 낮출 때도 그렇고, 기어 변속 시점의 언저리에서도 차체는 앞뒤로 요동친다. 울컥거림은 멀미를 유발하는 것은 물론이고, 끌어올리던 힘마저도 가라앉힌다. 이미 가속페달을 끝까지 밟았는데 가속은 더디기만 하다.
그래서 500의 듀얼로직 변속기의 기본 모드는 매뉴얼이다. 운전자가 조작하지 않는 이상 기어는 올라가지 않는다. 기어를 변속하라는 알림을 주기만 할 뿐, 전혀 도움을 주지 않는다. 수동변속기처럼 가속페달에서 발을 살짝 뗀 후, 변속하면 된다. 엔진회전수나 속도, 가속페달의 조작 타이밍에 따라 그 반응도 다르다.
기대 이상의 일체감과 기어의 직결감은 어느새 500의 선입견을 날려버렸다. 또 재미는 속도와 무관하단 것을 다시 한번 일깨워줬다. 기어가 철컥하며 맞물리진 않지만, 마치 랠리카 그것처럼 힘차게 당기며 고속도로와 산길을 달렸다. 5단이 아쉬웠던 것은 기어비나 반응 속도가 아니라, 이 짜릿하고 격렬한 동작이 너무 빨리 끝나서였다.
# 70mm의 차이
엔진도 국내 모델과는 다르다. 국내엔 최고출력 102마력의 1.4리터 멀티에어 엔진이 탑재된다. 볼로냐 공항에서 렌탈한 500에는 최고출력 69마력의 1.2리터 멀티에어 엔진이 탑재됐다. 이 정도면 숫자만 보고 판단해도 된다. 순간적인 폭발력은 물론이고 흉포한 이탈리아 고속도로 1차선에 쉽게 타이어를 들이기도 벅차다. 제원상 최고속도는 시속 160km지만 평지에서 시속 150km를 넘기긴 쉽지 않다. 이때의 엔진회전수는 3000rpm을 넘고 노면 소음나 바람소리도 거세다. 고속도로를 힘껏 달리다 톨게이트에서 속도를 줄일때 몹시 큰 음악소리에 깜짝 놀란다.
힘을 달리지만 고속 안정성만큼은 만족스럽다. 유독 무거운 스티어링은 고속에서 안정감을 높이는데 일조한다. 단순히 무겁기만 한게 아니라 방향 전환도 수준급이다. 국산 경차와 가장 차별화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래 봬도 슈퍼카 왕국 이탈리아 출신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또 시티모드를 제공해 도심해서는 스티어링휠의 감도를 조절할 수 있다.
국내 모델과 가장 큰 차이점은 서스펜션이다. 국내 모델은 최저지상고 등과 관련된 규정을 맞추기 위해 서스펜션을 늘렸다. 유럽 모델은 전고가 1488mm고 국내 모델은 1555mm다. 그래서 특유의 귀여움이 조금 변질되기도 했고, 코너링에서도 움직임이 매끄럽지 못했다. 무게 중심을 약 70mm 올린 것은 생각보다 크게 작용한다.
기존 설계 그대로 제작한 이탈리아 모델은 코너에서 신명나는 핸들링을 선사했다. 출력에 대한 부담도 없고, 무엇보다 고급차에 적용되는 15인치 콘티넨탈 콘티프리미엄콘택2가 뛰어난 그립과 제동력으로 힘을 보탰다.
또 500은 가볍다. 1톤에 조금 못미친다. 고속에서는 힘이 부치지만 조심에서는 힘에 대한 부족함이 느껴지지 않을만큼 경쾌하고, 비록 잽싸진 않더라도 일단 탄력을 받으면 일정 속도까지는 기대 이상의 성능을 보인다.
# 콩깍지가 씌었다
의외로 장거리 주행에서 큰 불편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주행에서 오는 스트레스나 피로도 적었다. 지레짐작으로 인한 선입견은 역시 좋지 않다. 제네바에서 만난 많은 기자들이 나에게 안부를 물었다. 괜찮냐고. 너무 멀쩡한데 다들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체구와 달리 1열 시트는 쾌적하고, 수납공간도 넉넉하다. 진동을 단번에 상쇄시키진 못하지만 소형차 중에서는 수준급의 승차감을 갖고 있고, 창문도 원터치로 끝까지 열리고 닫힌다. 비록 할로겐 램프지만 높낮이를 조절해 다양한 환경에서 더 나은 시야도 확보할 수 있다고 열변을 토했다. 그래도 궤변론자를 보는 눈치였다.
모터쇼 프레스 센터 마감 시간이 늦난 후 들어선 주차장엔 500만 우두커니 서 있었다. 괜한 열변을 토했나 싶다. 동그란 눈을 반짝이며 반기는 500의 모습만 보여줘도 될 것을.
* 장점
1. 디자인에 대한 철학. 내외관의 일체감.
2. 힘에 비해 고속 안정성은 수준급이다.
3. 운전의 재미. 속도가 전부는 아니다.
* 단점
1. 고속에서의 소음과 진동은 피할 수 없다.
2. 변속을 아무리 잘 해도 힘이 빠지는 것을 막기 힘들다.
3. 국내 모델은 예쁘게 보고 싶어도 너무 껑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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