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승기] 애스톤마틴 DB9 볼란테, V12 엔진은 언제나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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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진 키를 실내 가운데 센터페시아에 꽂는다. 견고한 손목시계처럼 보이는 계기반과 센터페시아의 각종 버튼이 빛을 낸다. 잠시 후 V12 자연흡기 엔진이 거친 숨을 토해낸다. 한번 거세게 숨을 내뱉고선 호흡을 가다듬는데, 디스토션이 잔뜩 걸린 일렉기타처럼 소리가 거칠다. 강렬했지만 그만큼 이질적이기도 했다. 머플러에서는 하얀 입김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었고, 휘발유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어쨌든 서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애스톤마틴은 강렬한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었다.
P모드로 멈춰선채 가속페달을 살짝만 밟아봐도 차체가 들썩거리고, 과격한 소리가 호텔을 쩌렁쩌렁 울리게 했다. 달리지 않고선 못 배기게 만든다. DB9 볼란테의 소프트톱은 15초면 열리는데 그 시간마저 기다리는게 무척 길게 느껴졌다. 물론 시속 80km까지는 달리면서 소프트톱을 작동할 수 있지만,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4.7초에 불과한 DB9 볼란테도 중간에 멈춰서길 바라진 않을 것 같았다.
# 그랜드 투어러의 덕목
기어 변경은 버튼식이다. 센터페시아 상단에 시동버튼을 사이에 두고 P, R, N, D 버튼이 가지런히 놓였다. 애스톤마틴은 이제 엮이고 싶지 않겠지만, 이런 방식은 포드도 사용하고 있다. 이 방식에 대해선 호불호가 많다. 하지만 처음만 어색할 뿐이지 이후 불편함은 그리 크지 않다. 또 덕분에 실내 디자인의 자율성이 높아져 애스톤마틴처럼 폼에 죽고 폼에 사는 브랜드에겐 장점이 될 수 있다.
어쨌든 기어 버튼은 생각보다 훨씬 가볍게 눌린다. 대단한 것을 기대했다면 실망한다. 그냥 버튼이다. 출발도 의외로 조용하고 차분하다. 움직임은 얌전한데 소리는 여전히 떠들썩하다.
좁은 도로에서 몇개의 과속 방지턱을 넘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탄탄한 스포츠카의 반응과는 거리가 멀었다. 차체가 극도로 낮지도 않았고, 사뿐하게 방지턱을 넘었다. 저돌적인 이탈리아 스포츠카와는 사뭇 달랐다. 기본적으로 애스톤마틴은 앞만 보고 달리는 스포츠카를 만들기 보단 멀리 보고 달리는 자동차 만들기에 열중해서다.
긴 거리를 달리는 차에겐 작은 불편 하나도 누적되면 극심한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시트는 편안하게 몸을 감싸야 하고, 그것이 여러 환경과 맞물려 편안함을 줘야 한다. 스코틀랜드의 최고급 가죽 제조 업체 ‘브리지 오브 위어(Bridge of Weir)’에서 제공 받은 가죽을 애스톤마틴의 작업자가 손수 재단하고, 바느질 한다. 천연 가죽의 질감을 잘 살린 ‘풀 그레인 가죽’은 포근한 표면으로 운전자를 감싼다. 단순한 편안함에서 머물지 않는다. 어떤 상황에서든 옆구리를 꽉 잡아주는 능력도 탁월하다.
스타일리시한 디자인도 알고보면 편안한 주행에 일조한다. 늘씬하게 쭉 뻗은 차체 디자인은 바람을 부드럽게 흘려보낸다. 또 살짝 솟은 리어 스포일러는 차체 뒷부분을 꾹꾹 눌러준다. 영국을 대표하는 디자이너 이안칼럼와 테슬라보다 먼저 전기차를 만들었던 피스커의 CEO이자 디자이너인 헨릭피스커가 디자인을 담당했다. 참고로 헨릭피스커는 BMW Z8, 애스톤마틴 V8 밴티지도 디자인했다.
거대한 엔진이 운전석 앞에 장착됐음에도 불필요한 진동이 전달되지 않는다. 강력한 V12 엔진과 거친 배기음이 조용하다고 할 순 없지만, 애스톤마틴은 이것이 소음이 아닌 소리(Not noise, just sound)라고 말한다. 오히려 불필요한 소음을 웅장한 엔진음과 배기음이 덮어버리는 형국이다. 비록 청명하진 않지만, 아드레날린을 마구 분비시키는 것 만큼은 확실하다.
# 폭발적인 V12 자연흡기 엔진
주행모드와 관련된 세팅은 단순하다. 스포츠 모드와 별도의 서스펜션 감도 설정 뿐이다. 스포츠 모드에서는 서스펜션과 스티어링, 스로틀, 기어 변속, 배기음 등이 변경된다. 중간은 따위는 없다. 일반 모드의 DB9과 스포츠 모드의 DB9는 완전히 다른 차다.
일반적인 주행에서는 특히 스로틀 반응이 많이 억눌려 있다. 517마력의 최고출력은 격렬함보단 여유로움으로 다가온다. 엔진 크기가 절반 정도인 여느 스포츠카의 몸놀림과 비슷하다. 운전자를 위축시킬만한 압도적인 매서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12기통이 달린 고급 세단보다도 엔진의 반응이 부드럽다. 서스펜션도 마찬가지다. 어디까지나 고성능 스포츠카 치고는 부드러운 편이라는 뜻이다. 특히 페라리나 람보르기니에서 느낄 수 있는 둔탁함은 찾아보기 힘들다.
스포츠 모드가 이차의 본모습은 아닌 것 같지만, 돌연 적극적으로 겁을 주기 시작한다. 이젠 가속페달을 밟는대로 엔진회전수가 빠르게 높아진다. ZF의 6단 터치트로닉2 변속기는 엔진의 힘을 쥐어짜낸다. 계기반을 통해 명확하게 레드존이 표시되지 않지만 6천RPM 부근에서 패들시프트를 당기면 목이 크게 흔들릴 정도의 강력한 변속충격을 동반하며 쏜살같이 튀어나간다.
헛바퀴 돌며 힘을 낭비하는 모습도 없다. 출발과 동시에 달려나간다. 회전수가 높아지면서 엔진음은 훨씬 날카로운 음색으로 변했고, 배기음은 온 동네를 울릴 정도로 커졌다. 스티어링휠은 다소 투박하게 생겼지만 반응은 매우 똘똘하다. 유압식 스티어링은 아주 작은 조작에도 반응한다.
# 숙성된 플랫폼과 애스톤마틴의 노력
애스톤마틴은 한명의 작업자가 책임지고 만든 6.0리터 V12 자연흡기 엔진을 최대한 차체 중앙으로 밀어 넣었다. 간신히 앞차축 사이에 엔진을 얹혔고, 무게 밸랜스를 위해 변속기는 뒷차죽 가운데에 놓았다. 덕분에 앞뒤 무게 배분은 51:49로 맞출 수 있었다.
또 차에서 가장 무거운 부품인 엔진을 최대한 도로와 가깝게 배치했다. 엔진 위치는 이전 세대 모델에 비해 19mm 낮아졌다. 스포츠카의 영원한 숙제 중 하나가 무게 중심을 낮추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만큼, 실질적으로 얻을 수 있는 효과는 단순히 19mm로만 표현할 수 없다.
애스톤마틴은 여전히 완전히 새로운 엔진이나 플랫폼을 개발할 여력이 부족한 것인지, 포드 산하에서 개발한 VH 플랫폼을 메인으로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해마다 개선되고 있으며, 점차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DB9의 플랫폼은 초기형이지만 최대 강성과 강도, 경량화를 위해 알루미늄과 마그네슘 등으로 제작됐으며, 항공기에 적용되는 접착 공법이 사용됐다.
결국 견고한 차체 만들기는 뛰어난 승차감과 핸들링의 밑바탕이 된다. 순간적으로 뒷바퀴에 온 힘이 전달되면 머리가 쭈뼛 서지만, 가속페달 만으로도 충분히 감내할 수 있다. 더욱이 믿음직스러운 피렐리 피제로와 카본세라믹 브레이크 시스템이 뒤를 받쳐준다.
V12 자연흡기 엔진을 고집하고 있는 브랜드는 드물다. 페라리나 람보르기니 등이 간신히 유지하고 있다. 거진 모든 라인업에 V12 엔진을 사용하고 있는 브랜드는 애스톤마틴이 유일하다. 또 애스톤마틴의 엔진은 이탈리아 스포츠카와 달리 잘 조련됐고, 범용성도 넓다. 100년 넘게 GT카를 전문적으로 만든 애스톤마틴만의 능력이다. 다운사이징이 대세인 요즘 시대에 애스톤마틴의 고집은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 장점
1. 굉장한 V12 자연흡기 엔진.
2. 이 시대 최고의 스타일리시카.
3. 이름에 GT를 내건 여러 GT보다 훨씬 편안하다.
* 단점
1. 국산 내비게이션이 내장될 계획이지만 디스플레이 자체가 너무 작다.
2. 경쟁 브랜드에 비해 신소재 및 첨단 기술 도입이 늦다.
3. 오픈에어링은 생각보다 바람이 심하게 들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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