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승기] ‘슈퍼SUV 그 이상’ 마세라티 르반떼 트로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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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포르쉐 카이엔의 성공을 기점으로, 럭셔리 브랜드들은 너나 할 것 없이 SUV를 내놓고 있다. 마세라티 역시 예외는 아니다. 과연 SUV 메이커로서 마세라티는 어떤 느낌일지 시승을 통해 알아봤다.
이번에 만난 마세라티는 브랜드 역사상 가장 강력한 출력을 자랑하는 ‘르반떼 트로페오’다. ‘가장 강력한’이란 수식어부터 ‘SUV는 빠르지 않다’는 편견을 지워준다. 넘치는 성능은 페라리로부터 이식받은 심장에서 기인한다.
이탈리아어 ‘트로페오’는 영어로 트로피를 뜻한다. 르반떼 기본 모델보다 1억여원이나 더 비싼 몸값의 고성능 모델임에도 불구하고 외모는 기본형과 크게 다르지 않다.
르반떼는 길이 5020mm, 폭 1980mm, 높이 1700mm 등 제원상 상당한 덩치를 가졌지만, 실물의 느낌은 사뭇 다르다. 정면에서 바라보면 마치 대형 고급 세단을 보는 듯하다.
전면부는 거대한 그릴이 압도한다. 그릴 가운데 위치한 삼지창 로고도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릴 간격은 작은 주먹 하나가 들어갈 정도다. 훤히 뚫려있지만 액티브 셔터가 적용돼 평소에는 안쪽 라디에이터가 보이지 않는다.
측면은 SUV보다 패스트백에 가까운 실루엣이다. 큰 엔진을 안쪽으로 밀어놓았기 때문에 가능한 비율이다. 후륜 플랫폼 기반으로 제작된 르반떼의 강점이다. 거대한 휠 아치와 뒤로 갈수록 급격하게 떨어지는 루프라인 등도 일반적인 SUV 이미지와 거리가 멀다.
큰 덩치를 웅크린듯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차량에 적용된 에어 서스펜션 덕분이다. ’에어 스프링’으로 명명된 공기 압축 서스펜션 시스템을 통해 6단계로 차고 높이 조절이 가능하다. 고속 주행 시 자동으로 차체를 낮춰 공기 저항을 줄인다. 가장 높게 설정하면 여느 SUV 못지않게 키가 커진다.
공격적인 전면부와 달리 다소 얌전한 후면부는 어딘가 어색하다. 일반 모델과 차이점은 리어 스포일러 형상과 머플러 주변 카본 마감이 전부다. 별도의 표기조차 없다. 그저 르반떼 이름 아래 그어진 밑줄만이 트로페오임을 암시한다.
우렁찬 배기음을 내기 전까지 590마력의 고성능 차량임을 알아채기 어렵다.
공격적인 외관에 비해 실내 디자인은 다소 심심하다. 그럼에도 곳곳에 고급 소재를 사용해 촉감은 만족스럽다. 손길이 닿는 곳 대부분이 가죽이나 카본 재질로 처리됐다.
스티어링 휠에 위치한 삼지창 로고와 메탈 재질의 거대한 패들 시프터, 그리고 빛나는 아날로그 시계가 포인트다. 천정과 필러에도 알칸타라를 덧대 고급감을 더했다.
시트는 최상급 피에노 피오레 천연 가죽으로 감쌌다. 실내 곳곳에 적용된 빨간 스티치가 시트에도 박혔으며, 헤드레스트는 트로페오 전용 로고로 마무리했다. 착좌감은 SUV답게 편안하다.
정사각형에 가까운 인포테인먼트 화면 비율은 옥에 티다. 내비게이션은 시인성이 좋지 못하며 사용하기에도 불편하다. 이밖에 저렴한 느낌의 스티어링 휠 버튼도 고급감을 해친다.
뒷좌석 공간은 무난하다. 쿠페형 디자인을 채택해 헤드룸을 다소 희생했지만, 답답한 느낌은 없다. 높은 가격대에 비해 햇빛 가리개나 전동 시트 등 뒷좌석 옵션이 빠진 점은 아쉽다.
트렁크 공간은 580리터를 확보했으며, 뒷좌석 폴딩시 1625리터까지 늘어난다. 핸즈 프리 리프트게이트 기능이 적용돼 간편하게 짐을 적재할 수 있다.
르반떼 트로페오의 핵심은 엔진이다. 메르세데스-AMG, BMW M, 아우디 RS 등이 고성능 모델임을 강조하듯, 르반떼 또한 ‘트로페오’를 내세운다.
이탈리아 마라넬로 페라리 공장에서 생산되는 3.8리터 V8 트윈 터보 엔진은 최고출력 590마력, 최대토크 74.8kgf·m를 발휘한다. 정지 상태에서 100km/h 가속까지 3.9초 만에 도달한다. 최고안전속도는 304km/h다. 엔진 장인 페라리와 음색 장인 마세라티, 두 장인이 만나 엄청난 시너지를 일으킨다. 시동을 거는 순간부터 이 차가 범상치 않은 성능을 지녔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
최상위 모델인 트로페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 있다. 바로 궁극의 주행 모드 ‘코르사(Corsa)’다. 경주라는 뜻의 이탈리아어는 SUV였던 르반떼를 슈퍼카로 탈바꿈시킨다.
코르사 모드에 진입하면 차량이 뒤뚱거리는 것이 느껴진다. 에어 서스펜션이 가장 낮은 차체 포지션으로 세팅되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차체제어장치가 꺼진다. OFF라는 주황색 글자가 긴장감을 불러온다.
엔진음도 한층 더 크게 들려온다. 한층 민감해지는 페달 반응 때문이다. 궁극의 모드가 체결된 르반떼 트로페오는 가속 페달에 살짝만 힘을 줘도 신경질적으로 튀어 나간다. rpm은 항상 고회전 영역을 유지하며, 한층 단단해진 서스펜션은 운전자에게 노면 상황을 보다 더 선명하게 전달한다.
차량에 적용된 전자식 사륜구동 시스템 ’Q4’는 높은 출력을 제어하는 데 있어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도 큰 도움을 준다.
ZF가 만든 8단 변속기는 빠르고 정확하게 단수를 맞춰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르사 모드에서는 수동 모드로 변속을 하는 게 제맛이다. 거대한 패들 시프터는 기계식 키보드와 같은 쫀득한 조작감을 선사한다. 3일간 시승에서 자동 변속을 한 경우가 거의 없다. 코르사 모드와 수동 변속의 조합은 어떤 구간에서도 운전자에게 즐거움을 선사한다.
트로페오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특권은 런치 컨트롤이다. 마세라티의 런치 컨트롤은 코르사 모드에서만 즐길 수 있다. 브레이크 페달을 강하게 밟은 상태에서 ‘-’ 페달을 당기면 런치 컨트롤 활성화 문구가 계기판에 표시된다. 그 후 운전자는 두 손으로 운전대를 꽉 쥐고 가속페달을 끝까지 밟고 튀어 나갈 준비만 하면 된다.
잠시 숨을 고르고 브레이크 페달을 떼면 눈 깜짝할 새 100km/h를 돌파한다. 런치 컨트롤을 작동하는 순간에는 2톤이 넘는 SUV를 탔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게 된다. 이 차가 페라리의 심장을 얹은 슈퍼카라는 점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코르사에서는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르반떼 트로페오지만, 컴포트 모드에서는 그 성격을 180˚ 바꾼다. 패밀리 SUV로 변모하는 순간이다.
스로틀 반응은 부드러워지고 서스펜션도 한층 힘을 뺀다. 22인치 대형 휠과 낮은 편평비의 타이어가 적용됐음에도 에어 스프링 서스펜션이 훌륭하게 노면 충격을 걸러낸다. 연비 주행에 최적화된 I.C.E.(Increased Control and Efficiency) 모드를 체결하면 르반떼 거동은 더 얌전해진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엔진음만 제외하면 여느 SUV와 별반 다르지 않은 승차감이다. rpm을 낮게 쓰는 정속 주행 시 가변 배기가 닫히기 때문에 엔진 소리도 매우 작게 들려온다.
르반떼 트로페오에는 17채널 1280W 출력의 바워스앤윌킨스 오디오가 탑재됐다. 다만 시승하는 동안 청음할 여유는 없었다. 매혹적으로 들려오는 V8 엔진 사운드를 마다할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의외로 실내에서는 엔진음이 작게 들린다. 차량 외부에서는 8기통 소리가 우렁차게 울부짖지만, 막상 운전자는 그 울음소리를 듣기 힘들다. 실내에서 들려오는 엔진 및 배기음은 ‘음색’은 좋으나 ‘음량’이 부족하다. 적어도 코르사 모드만큼은 엔진음 유입을 조금 더 허용해도 되지 않을까.
감성과 연비는 반비례라고 했던가. 아름다운 고회전 엔진음을 듣는 대가는 ‘공인 연비 5.7km/l’이다. 막히는 시내와 고속도로를 적절히 주행한 650km 시승에서 평균 연비는 4.9km/l를 나타냈다. 컴포트 모드로만 달리더라도 두 자릿수 연비를 달성하기 어렵겠다.
2억원짜리 슈퍼카 오너에게 기름값이 뭐가 대수겠냐 싶지만, 고급 휘발유를 취급하는 주유소를 찾아야 하는 번거로움도 생각해야 한다. 특히 지방 도로에서는 고급 휘발유를 판매하는 주유소를 찾기가 쉽지 않다. 전기차 배터리 잔량과 비슷한 압박을 받았다. 한밤중 연료가 떨어지면 난감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르반떼 트로페오는 실용과 성능 모두를 갖춘 진정한 ‘전천후’ 자동차다. 높은 차고와 강력한 엔진은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적절한 쓰임새를 제공한다. 도로에서 르반떼 트로페오보다 빠른 차량을 만나는 일은 흔치 않을 것이다.
스포츠카 브랜드로서 SUV를 만드는 것은 까다로운 마니아들의 입맛을 맞추기에는 다소 부담스러울 수 있다. 그럼에도 마세라티는 트로페오라는 강력한 제품을 선보이며, 그들의 불만을 해소함과 동시에 브랜드 정체성까지 챙겼다. 앞으로 나올 트로페오 라인업의 기대가 더 커지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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