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승기] 벤틀리 벤테이가…”SUV, 그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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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인간은 누구나 소비욕구를 지니고 있다. 미국의 행태 심리학자 아브라함 매슬로(Abraham Maslow)는 저서 ‘동기와 성격(Motivation and Personality)’를 통해 인간의 욕구를 5단계로 규정했다. 욕구의 단계가 높아질수록 ‘자기표현’을 위한 소비가 강조되고, 특히 남들과 차별화된 ‘상품’에 대한 욕구가 높아지게 된다.
자동차는 탄생과 동시에 인간의 욕구 단계를 충족시키는 좋은 수단으로 자리잡았다. 부유층을 위한 놀이와 문화가 생겨나기도 했고, 가장 효과적인 과시 수단으로 자리매김했다. 스포츠카는 끊임없이 성능을 높이며 가격을 올렸고, 세단은 더욱 호사스럽게 치장하며 가치를 높였다.
B세그먼트 SUV의 가격도 부담스러워하는 우리와 달리, 수억원이 넘는 SUV를 기다리던 부자들은 많았다. 랜드로버 레인지로버는 고급 SUV의 대명사가 됐고, 포르쉐 카이엔는 그 성능만큼이나 빠르게 시장을 점령했다. 그런데 자극은 계속될수록 무뎌지고, 욕구는 채워질수록 부족해지는 법. 더 고급스럽고, 더 특별한 SUV를 원하는 시대적 요구가 전통과 역사를 중요시하는 벤틀리를 흔들었다.
벤틀리가 폭스바겐그룹의 플랫폼을 활용해 SUV를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단, SUV를 만들어야 하는 정당성과 벤틀리의 성격을 담을 수 있느냐가 관건이었다. 그래서 벤틀리는 자신들의 ‘레이싱’ 아이덴티티를 벤테이가(Bentayga)에 담았다.
독창적인 W12 엔진은 벤테이가를 독보적으로 만들었다. 이 엔진을 바탕으로 벤테이가는 ‘세상에서 가장 빠른 SUV’가 됐다. 608마력의 최고출력을 발휘하는 6.0리터 W12 트윈터보 엔진은 끝을 알 수 없는 힘으로 네바퀴를 굴렸다.
엔진의 힘은 풍족함을 넘어서, 과할 정도였다. 품위있게 달리고, 편안하게 움직이는 벤틀리에서 폭력성이 느껴졌다. 두개의 터보 차저가 뜨거운 숨을 엔진에 쏟아붓기 시작하면서 벤테이가의 얼굴이 변하기 시작했다. 폭발적인 엔진 힘으로 치고 나가는 순간은 간담이 서늘했다. 돌진하는 코뿔소가 떠올랐다. 카이엔 터보에서도 떠올리기 힘든 두려움이 느껴졌고, 플라잉스퍼에서도 경험하기 힘들었던 순발력이 보였다. 벤테이가는 공기저항 따위는 비웃으며 순식간에 속도계 바늘을 옆으로 눕혔다.
벤테이가는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4.1초만에 달리고, 최고속도는 시속 301km에 달한다. 다운포스를 크게 고려하지 않은 디자인이지만, 그 무게 때문인지 노면과 밀착해 앞으로 나갔다. 벤틀리가 추구하는 GT의 성격이 벤테이가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풍족한 힘을 바탕으로 한없이 부드럽게 달릴 수 있었다. 달릴 땐 어떤 벤틀리보다 화끈했지만, 슬며시 전진하는 모습은 여느 벤틀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벤틀리는 ‘기름 먹는 괴물’인 W12 엔진의 효율을 높이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직접 분사와 간접 분사가 모두 가능하게 만들었고, 정속 주행 상태에서 엔진의 절반만 작동시키는 ‘가변 배기량 시스템’도 적용했다. 또 이 상황에서 가속페달의 발을 떼면, 토크 컨버터가 열리며 엔진이 정지하고 운동 에너지만으로 달리게 된다. 이런 여러 기술로 인해 기존 W12 엔진에 비해 효율은 11.9% 향상됐다고 벤틀리는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태생을 극복하긴 힘들었고, 다만 연료통이 크다는게 조금 위안이 됐다.
플랫폼을 공유하는 아우디 Q7에 비해서는 약 200kg 가량 무겁지만, 레인지로버나 에스컬레이드와 비교하면 오히려 더 가볍다. 겉으론 크게 티가 나지 않지만, 경량화를 위해 알루미늄 모노코크를 사용했고, 언더 바디와 대부분의 외부 패널도 알루미늄으로 제작됐다. 덕분에 컨티넨탈 GT보다 차체는 훨씬 크지만 무게는 약 100kg 밖에 차이나지 않는다.
벤틀리는 그동안 숱한 ‘덩치’를 만들어왔지만, 벤테이가는 조금 다르다. 무거우면서도 키가 크다. 뮬산도 어깨가 높긴 하지만, 벤테이가와는 차이가 크다. 벤틀리는 거대한 벤테이가가 코너에서도 안정성과 민첩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아우디의 기술을 빌렸다. ‘벤틀리 다이내믹 라이드’로 불리는 이 기술은 48V 리튬이온 배터리를 사용해, 안티롤 바를 전기모터로 회전시킨다. 좌우를 반대방향으로 회전시키며 코너링 시 유발하는 횡력에 대응하고, 타이어 접지력을 높인다. 코뿔소 같던 벤테이가가 치타처럼 방향을 전환할 수 있었던 이유다.
또 온로드와 오프로드를 합쳐 총 8가지 주행 모드를 선택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전자식 파워 스티어링, 에어 서스펜션 등의 감각이 시시각각 달라진다.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도 최적의 승차감과 안정성을 발휘하게끔 벤테이가는 끊임없이 노력했다. 컴포트 모드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무릎과 발목을 접었다 폈지만, 스포츠 모드에서는 거동에 군더더기가 사라졌고, 파워트레인의 응답성도 훨씬 자연스러웠다. 가장 벤틀리다웠다.
굳이 달리지 않아도 벤틀리임을 알 수 있는 부분은 많았다. 원형 헤드라이트와 주간주행등, 격자 무늬가 선명한 거대한 그릴,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휠 아치와 팬더는 위풍당당한 벤틀리의 모습 그대로였다. 22인치에 달하는 휠과 범퍼를 보호하는 스키드 플레이트는 SUV의 역동성도 부각시켰다. 벤틀리 특유의 ‘슈퍼포밍’ 공법으로 만들어진 알루미늄 패널 덕분에 벤테이가는 하나의 완벽한 덩어리처럼 느껴졌다.
탄성이 절로 나오는 벤테이가의 실내는 여느 벤틀리와 마찬가지로 아날로그적인 멋이 가득했다. 다른 부분이 있다면 계기반 중앙엔 대형 LCD 패널이 자리했고, 그동안 벤틀리에서 볼 수 없었던 전자식 기어노브가 적용됐다. 조금 더 현대적으로 꾸며졌을 뿐, 벤틀리가 추구하는 가치는 달리지지 않았다. 오히려 벤틀리는 벤테이가를 위해 작업자들을 새롭게 구성했고, 벤테이가에만 들어가는 목재를 따로 준비했다. 실내 구석구석을 덮은 최상급 황소 가죽은 시원한 유럽 기후에서 자연스럽게 태닝되고, 어떤 코팅이나 인쇄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원목의 무늬는 아름다웠고, 가죽은 더없이 부드러웠다. 꼼꼼한 바느질은 시선을 사로잡았고, 가죽 냄새는 은은하게 공간을 채웠다. 주문 제작이나 수작업으로 차를 만드는 회사는 많지만, 벤틀리처럼 확고한 정체성을 담을 수 있는 브랜드는 드물다. 시대가 바뀌고, 과학은 빠르게 발전하고 있지만, 결국 중요한 건 사람이다. 수십년간 손으로 차를 만든 장인들이 누구도 쉽게 흉내낼 수 없는 벤틀리를 만들고 있다.
공장에서 분 단위로 찍어내는 차와 달리, 벤테이가는 한대가 완성되는데 보통 130시간이 걸린다. 그만큼 신중하고, 정교하게 그리고 완벽하게 태어났다. 수많은 SUV가 탄생하고 있지만 벤테이가는 다른 누구와 비교해 한 카테고리에 묶을 수 없을 만큼 독보적이다. 벤테이가를 추격할 SUV가 계속 늘겠지만 지금으로선, 벤테이가는 SUV, 그 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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