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승기] 렉서스 RC F, 결핍이 느껴지지 않는 스포츠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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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온은 30도를 훌쩍 넘었다. 어느새 머리 꼭대기에 멈춰선 태양은 저절로 얼굴을 찡그리게 했고, 아스팔트는 쉬지 않고 뜨거운 입김을 내뿜었다. 현기증에 가만히 서 있는 것 조차 힘들었다. 아지랑이가 시야를 더욱 어지럽게 만들 때, 이름도 난해한 ‘히트 블루 컨트라스트 레이어링(HEAT BLUE CONTRAST LAYERING)’ 색상의 RC F가 인제스피디움에 도착했다.
강한 햇빛이 카본파이버 보닛에 반사돼 눈을 찔렀다. 양산차 제조사에서 보닛을 카본파이버로 제작하는 일은 드물다. 무게는 2.9kg 줄었다. 카본파이버 루프를 통해선 6.1kg를 줄였다. 조금이나마 더 가벼워지고 무게 중심을 낮추는데 일조하지만, 역시 시각적인 효과가 더 크다. 실제로 RC F는 거대한 스핀들 그릴과 날카로운 눈매보단 카본파이버 보닛이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다.
떠들석할 줄 알았던 숨소리는 의외로 조용했다. IS F에게 물려받은 멋들어진 머플러는 미세하게 떨릴 뿐 폭발력을 선사하진 않았다. IS F도 그랬다. 배기음은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실내에선 어떤 차보다 격정적인 소리를 들려줬다. 더욱이 RC F는 액티브 사운드 컨트롤을 더 세밀하게 조절했다. 그래서 기대감이 높았다.
원활한 공기 흐름과 엔진 및 브레이크 냉각을 위한 에어 인테이크가 차체 곳곳에 마련됐다. 특히 앞바퀴 뒷부분의 인테이크는 무척 크고 화려하다. 마치 미드십 스포츠카의 인테이크 같다. 다소 복잡하다고 느껴질 수 있는 여러 선과 구멍 등은 전부 각각의 기능을 갖고 있다. RC F의 디자인은 기술에 지배당했다. 특히 렉서스는 하이브리드 연구를 통해 얻은 세계 최고 수준의 공기역학 기술을 갖고 있고 이 기술은 RC F에 아낌없이 적용됐다.
슬슬 차의 곳곳을 둘러보고 있으려니, 인제스피디움 서킷의 문이 열렸다.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서킷엔 아무도 없었고, 타이어를 태우기엔 더 없이 날씨는 좋았다. 서둘러 서킷에 진입했다. 그리고 코스에 합류하자 마자 V8 자연흡기 엔진을 사정없이 돌렸다.
# 멸종 위기의 대배기량 자연흡기 엔진
BMW M4나 메르세데스-AMG C63 쿠페 등의 유럽 고성능 모델을 경쟁자로 지목하지만, 렉서스의 주무대는 어디까지나 미국이다. 마냥 유럽차를 따라갈 수만 없는 상황이다. 미국엔 여전히 대배기량 엔진을 사용하는 스포츠카가 많다. 이는 렉서스가 자연흡기 엔진을 유지할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다. 포드 머스탱, 닷지 바이퍼 등 전형적인 미국의 스포츠카가 본격적으로 터보를 도입하기 전까지 렉서스도 굳이 엔진을 바꾸지 않을 것 같다.
대배기량 자연흡기 엔진의 강력한 힘은 서킷에서 더욱 잘 느낄 수 있었다. 1-3단까지의 기어비는 꽤 길었다. 2단으로 시속 110km까지 달릴 수 있고, 3단으로 시속 160km까지 갈 수 있었다. 공략하기 난해한 코너의 연속이었던 인제스피디움에선 기어를 높게 쓰는 빈도수가 적었다. 엔진회전수를 최대한 사용하면서 무한할 것 같은 힘으로 뒷바퀴를 돌렸다.
엔진회전수가 빠르게 상승하면서 최고출력이 발휘되는 7100rpm에서 RC F는 살짝 숨을 고르고 무섭게 속도를 높였다. 3단에서부턴 기어비가 매우 촘촘했다. 크게 움직이던 회전계의 바늘도 이때부턴 작은 범위를 절도 있게 움직였다.
4단으로 변속되면 회전계의 바늘은 5700rpm으로 떨어졌고, 다시 힘을 끌어올렸다. 시속 210km를 넘어서야 5단으로 변속됐다. 여전히 가속페달의 반응은 민감하고, 불안감도 없었다. 인제스피디움의 짧은 직선주로가 아쉽게만 느껴졌다.
RC F의 5.0리터 V8 DOHC D4-S 듀얼 VVT-I 엔진은 회전수에 따라 정직하게 반응했다. 저속주행에서는 무척 얌전했지만, 3500rpm을 넘어서면 제성격을 드러냈다. 굉장히 민감해졌다. 내가 의도한 속도, 발끝의 힘, 가속페달의 답력, 시시각각 변하는 출력 등 모든 것이 하나의 과정으로 통합됐다. 마치 복잡한 중간단계가 다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의도가 곧바로 반영됐다.
자연흡기 엔진의 매력은 대단하다. 공기를 다시 빨아들이고, 터빈을 돌리고, 남은 공기를 배출하는 복잡한 과정이 없다. 사람이 결코 장시간 숨을 의식하며 쉴 수 없는 것처럼, 자동차도 자연스럽게 호흡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물론 터보 차저 기술이 발전하면서, 이런 이질감 등은 많이 해소됐다. 그럼에도 아직까진 고성능 모델에선 선입견을 깡그리 지울순 없다. 그리고 대배기량 자연흡기 엔진은 멸종 위기다. 마음에 들건 안들건 각별히 보호해야 한다.
# Makes driver?
사실 요즘의 터보 차저 엔진은 자연흡기 엔진이 그립지 않을 정도로 발전했다. BMW M4의 3.0리터 V6 터보 차저 엔진이나, 메르세데스-AMG GT의 4.0리터 V8 터보 차저 엔진은 눈물 날 정도로 감동적이다. 그래서 RC F의 자연흡기 엔진의 감흥은 그렇게 크진 않았다. 또 기존 엔진의 대부분을 새롭게 설계했다지만, 성격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서킷을 달리는 RC F가 더 가슴을 울린 것은 코너에서의 움직임이었다. 엔진회전수는 빠르게 치솟고, LFA의 소리를 닮는데 노력했다는 액티브 사운드 제네레이터가 쉴새없이 흥분을 고조시켰는데 조작은 무척이나 쉽고, 핸들링은 편안했다. 타이어 상태도 그리 좋지 않았던 상황이라 코너마다 꽁무늬가 먼저 앞으로 달려나갈까 내심 걱정했는데, 흔들림 하나 없이 빠른 속도로 코너를 통과했다.
스티어링휠을 돌리데 큰 힘이 들어가진 않았다. 하지만 일단 스티어링휠을 돌려 방향을 정하면 타이어의 저항이 그대로 느껴질 정도로 반발력이 생겼다. 여기서 조금 더 돌리고, 조금 더 묵직해지면서 코너를 빠져나갔다. 넓고 낮은 디자인과 레이저 스크류 용접 및 차량용 접착제 사용을 늘린 뼈대, RC F만을 위해 개발된 서스펜션 등은 감당하기 힘든 무게가 쏠림에도 차체의 흐트러짐을 막았다.
스탠다드, 슬라럼, 트랙 등 세가지 모드로 지원되는 토크 벡터링 디퍼렌셜(TVD)은 운전자의 미숙한 실력까지 보완해준다. 보통 사람을 능숙한 드라이버로 변신시킨다. 오랜만에 달린 인제스피디움이 마치 집에 가는 길처럼 편안했던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문득 렉서스는 운전자를 신뢰하지 않는단 기분이 들었다. 난 단지 RC F에 타고 있을 뿐이지 그 이상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렉서스가 설정한 범위 안에서만 움직이고 있는 기분이었다. 빠르게 개입하는 전자장비도 운전자의 실수를 용납하지 않으니, 운전자는 이를 대처할 방법을 알지도 못하고, 알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분명 서킷에서 좋은 기록을 낼 순 있겠지만 큰 재미는 없었다.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누구든 빠른 기록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드라이버를 만든다는 것과 드라이버를 키우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RC F는 도요타 86과는 정반대란 생각이 들었다.
# 누구보다 섬세한 차를 만든다
BMW는 운동성능을 위해 M 모델엔 일부 옵션까지 빼버린다. 이에 반해 RC F는 렉서스가 넣을 수 있는건 다 넣었다. 소소한 편의 장비 하나 아쉬운게 없다. 렉서스에서 가장 빠르면서 가장 화려하고, 가장 고급스럽다. RC F가 앞만 보고 달리기 위한 차는 아니라는 얘기다.
얼굴은 험상궂지만 평소엔 무척 조용하고 평온하다. 렉서스 세단의 승차감을 갖고 있어 고성능 쿠페 중에서 단연 세계 최고 수준이다. 노면의 기울기나 각종 환경이 온몸으로 전달되는 M4와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다.
알칸타라와 가죽, 카본파이버가 아낌없이 사용된 실내는 렉서스의 브랜드 정체성을 잘 설명해준다. 일본 특유의 섬세함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시트와 센터콘솔의 사이, 시트 밑바닥, 스티어링 칼럼의 플라스틱 등 굳이 손이 잘 가지 않는 부분까지 섬세하게 매만졌다.
실내 디자인은 기능적으로도 탁월하다. 평범해보이지만 스티어링휠은 그립감이 뛰어나고, 소재나 바느질도 흠잡을 것이 없다. 회전계가 중앙에 놓인 계기반은 LFA의 것을 개량했다.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 주행 모드에 따라 그래픽이 바뀌는 것은 물론이며, 랩타임, G포스, 스로틀 및 브레이크, 스티어링 상황 등을 보여준다. 또 좌우 바퀴의 토크 배분까지 나타낸다.
스포츠 시트는 몸을 지지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엉덩이, 허벅지부터 시작해, 허리, 어깨까지 완전히 감싼다. 알칸타라를 사용해 미끄러짐도 방지하고 감촉도 우수하다.
많은 것을 넣다보니 대신 차가 무거워졌다. 실내외를 카본파이버로 감쌌지만 무게는 무려 1825kg에 달한다. M4와 비교하면 약 250kg 가량 무겁다. 하지만, 그 엄청난 무게차이가 신기하게도 서킷 주행에서는 잘 느껴지지 않았다.
# 더 높은 곳을 향해
문짝이 두개인 것부터 시작해서, 스포츠카는 몹시 불편하다. 결핍으로 가득찬 차다. 대신 이를 ‘그까지 것’이라고 가볍게 넘겨버릴 수 있는 극단적인 매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 아쉽게도 RC F에겐 그런 강력한 한방은 없었다.
하지만 결핍도 없었다. 오히려 모든 것이 풍족했다. 어느 것 하나 허투루 할 수 없다는 욕심이 가득 느껴졌다. 여러 부분을 수치화해 총합을 매긴다면, RC F보다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는 차는 손에 꼽을 정도겠다. 그런 점이 굉장히 새롭고, 독특했다.
서킷을 달리는 것, 도로를 달리는 것이 별반 다르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편안하게 달렸고, 또 그 공간은 무척이나 아늑했다. 수억원을 호가하는 최고급 스포츠카에서나 느껴지는 감성이 전달됐다. BMW M4와는 많이 달랐고, 메르세데스-AMG C63 쿠페에 더 가까웠다. 하지만 렉서스는 그보다 한단계 높은 곳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 장점
1. 고성능 쿠페를 서킷에서 조작하는게 이토록 쉽다니.
2. 렉서스 세단의 장점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3. 렉서스 중에서 가장 고급스럽고, 화려하다.
* 단점
1. 엔진 성능에 비해 변속기의 반응은 평범하다.
2. 차체 자세 제어 장치의 간섭이 매우 극성이다.
3. 리모트 터치 인터페이스는 전혀 편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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