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페라리 488 스파이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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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볼로냐에서 페라리 488 스파이더를 시승했다. 488 GTB를 기본으로 전동식 하드톱을 얹은 컨버터블이다. 파워트레인과 시속 0→100km 가속 시간은 488 GTB와 같지만 그 이후의 가속과 최고속도는 살짝 밑돈다. 대신 지붕을 벗겼을 때 들이치는 사운드와 온몸으로 느끼는 체감 가속은 488 GTB를 성큼 웃돈다.
“페롸아아뤼~” 볼로냐 인근 읍내에서 마주친 노인이 손을 번쩍 들며 외친다. ‘페라리 앓이’엔 남녀노소가 따로 없었다. 페라리와 눈이 맞은 학생들은 건널목에 진을 친 채 ‘폰카’ 찍느라 정신없다. 신호 대기 때 자전거 타고 지나가던 젊은이는 고개가 부엉이처럼 꺾이도록 페라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꼬맹이들은 헐레벌떡 달려 페라리 꽁무니를 뒤쫓았다.
흔히 포르쉐 바이러스란 표현을 쓴다. 한번 몰아보면 그 매력에서 헤어나기 어렵단 뜻이다. 한데, 페라리 바이러스는 한층 강력하다. 그저 쳐다만 봐도 곧바로 전염된다. 그리고 즉시 얼굴에 함박웃음이 피어난다. 눈 마주친 모든 이들이 행복해 하니 기자 또한 기뻤다. 누구나 알아보고 좋아해주는 스타라도 된 것처럼 뿌듯했다. 이 맛에 페라리를 타는구나 싶었다.
쿠페 성능 기반으로 감성 부각시켜
488 GTB를 시승한 지 넉 달 만에 이탈리아 볼로냐를 다시 찾았다. 이번에도 488이다. 그런데 이름 뒤에 GTB 대신 스파이더가 붙는다. 컨버터블이란 뜻이다. 이번 행사는 488 GTB 시승회와 많이 달랐다. 당시엔 공장 취재도 곁들였다. 하지만 이번엔 오롯이 시승뿐이다. 페라리 전용 놀이터, 피오라노 트랙도 가지 않는다. 테스트 드라이버의 훈수도 없다.
시승은 경치 좋은 국도를 따라 유유자적 달리는 코스에서 치러졌다. 초청한 언론도 라이프스타일 매체 위주다. 영국에서 온 중년 여기자는 “태어나서 페라리를 처음 타게 되었다”며 소녀처럼 기뻐했다. 페라리 홍보담당이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이번 시승의 테마가 빤히 들여다보였다. 바로 여유와 낭만이다. 눈과 어깨의 긴장을 풀고, 느긋하게 즐기는 행사였다.
지난 10월 19일, 볼로냐 공항에 내려섰다. 애꿎은 기자의 짐 가방은 박살이 나서 나왔지만, 날씨 하난 기가 막혔다. 이번 시승회는 숙소 또한 특별했다. 오랜 전통의 와이너리에 짐을 풀었다. 포도밭으로 에워싸인 능선에 건물 몇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아득히 먼 저편에서 볼로냐가 신기루처럼 아른거렸다. 숙소 앞 벤치에 앉아 나른한 오후의 여유를 즐겼다.
이날 저녁, 페라리는 공식 만찬을 준비했다. 식사에 앞서 488 스파이더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했다. 아담한 홀에서 세련된 ‘블루 코르사’ 컬러로 단장한 488 스파이더 한 대가 우리를 맞았다. 페라리는 488 스파이더의 핵심을 강조했다. ① 오픈 에어 드라이빙의 즐거움, ② 오픈했을 때의 엔진 사운드, ③ 최고의 성능, ④ 편안하고 실용적인 실내 등 네 가지다.
페라리가 꼽은 ‘엑기스’의 절반이 결국 감성인 셈이다. 페라리 스파이더의 원조는 1977년 내놓은 308 GTS였다. 정확히는 타르가톱이었다. 1989~1993년 나온 348 스파이더부터 비로소 완전히 차체 위쪽을 오려냈다. 이후 1995년 F355 스파이더, 2000년 360 스파이더, 2005년 F430 스파이더, 2011년 458 스파이더를 거쳐 488 스파이더가 나왔다.
488 스파이더의 주요 시장도 소개했다. 5대 시장은 영국과 미국, 독일, 일본, 중국이다. 33%에 머문 중국을 빼면 전체 페라리 판매 가운데 스파이더 비율이 절반 이상인 나라들이다. 영국은 54%나 된다. 타깃 고객과 관련된 흥미로운 통계도 소개했다. 60%는 이미 페라리를 가진 오너다. 가망 고객의 90%는 기존에 스파이더(컨버터블)를 산 경험이 있다.
페라리는 이들의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조사도 마쳤다. 가령 이들은 스포티하되 공격적이지 않은 운전을 선호한다. 쿠페 오너보다 더 자주 운전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지붕을 접은 채 보낸다. 주로 교외로 드라이브를 가고, 주말이 아니더라도 각종 이벤트에 적극적으로 참석한다. 무엇보다, 이들은 지붕을 벗겼을 때 더 크고 선명해지는 사운드에 열광한다.
터보로 돌아서며 극적으로 효율 개선
488 스파이더의 디자인은 많은 부분을 GTB와 공유한다. 페라리는 ‘지붕을 열건 닫건 공기역학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고 강조한다. GTB와 달리 엔진룸은 들여다보이지 않는다. 하드톱 커버가 덮는 면적 때문이다. 그래서 458 스파이더처럼 불투명한 패널을 씌웠다. 각 좌석 뒤엔 롤 바를 숨겼다. 이 때문에 굵은 돌기 두 개가 솟았다. 근데 이게 볼수록 멋지다.
엔진 커버엔 두 개의 구멍을 뚫었다. 엔진 때문에 후끈 달아오른 공기를 빨리 빼내기 위해서다. GTB와 마찬가지로 도어 뒤엔 커다란 흡기구를 뚫었다. 엔진으로 신선한 공기를 공급하기 위한 통로다. 도어 손잡이도 GTB와 같다. 그 자체로 에어로 핀 역할을 한다. 나머지 디자인은 양산 페라리 가운데 최고의 공력성능을 뽐내는 GTB와 판박이다.
심장도 488 GTB와 같다. V8 3,902㏄ 가솔린 직분사 트윈 스크롤 터보다. 458 스파이더보다 배기량을 595㏄ 줄이고도 670마력을 뿜는다. 최고출력은 8,000rpm에서 나온다. 하지만 고회전 엔진이라고 보기 어렵다. 최대토크 77.5㎏·m를 3,000rpm에서 토해내는 까닭이다. 458 스파이더의 경우 최고출력은 9,000rpm, 최대토크는 6,000rpm에서 나왔다.
페라리는 터보로 ‘변심’한 이유를 장황하게 설명했다. 그러나 누구나 안다. 나날이 엄격해지는 배기가스 규제 때문임을. 페라리는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역대 모델별로 소개했다. F430 스파이더가 345g/km, 458 스파이더가 275g/km였다. 반면 488 스파이더는 이 수치를 260g/km까지 확 끌어내렸다. 100마력이나 올라간 최고출력을 감안하면 드라마틱한 변화다.
단지 효율만 높인 게 아니다. 반응도 더 빨라졌다. 터빈은 티타늄-알루미늄으로 만들고, 특수 코팅으로 밀폐성을 높인 덕분이다. 그 결과 압축효율과 마찰저항, 내열성이 동시에 치솟았다. 페라리의 자료에 따르면 488의 페달 조작에 따른 반응 시간은 0.06초에 불과하다. 각 기어 단수별 가속 또한 25%씩 빨라졌다고 한다. 이 정도면 명분은 충분한 셈이다.
14초 만에 여닫는 전동식 하트톱
다음날 새벽의 정적 깨는 엔진 소리에 눈을 떴다. 창밖 너머 분주히 움직이는 페라리 스태프들이 보였다. 준비를 마치고 나섰을 땐 색깔별 488 스파이더가 칼 같이 줄을 맞춰 서 있었다. 차마다 유효기간 하루짜리 ‘임시 오너’의 이름을 쓴 종이가 놓여 있었다. 기자에게 허락된 ‘오늘의 페라리’는 강렬한 핏빛으로 물들인 488 스파이더였다. 역시 페라리는 레드가 ‘진리’다.
우리는 간단한 브리핑을 들은 뒤 각자의 차로 뿔뿔이 흩어졌다. 산등성이여서 그런지 제법 쌀쌀했다. 그러나 기자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뚜껑부터 열어 젖혔다. 지붕은 458 스파이더처럼 알루미늄으로 짰다. 당시 세계 최초의 MR(미드십, 리어 엔진) 하드톱으로 뜨거운 관심을 모은 이 차는 지붕을 두 조각으로 나눠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여닫을 수 있다.
톱의 무게는 45kg, 접어 포갰을 때 부피는 100L에 불과하다. 페라리 측은 ‘우산처럼 뼈대(살)에 직물을 씌운 소프트톱보다 25kg 무거울 뿐'이라고 강조했다. 하드톱은 스위치를 눌러 유압으로 14초 만에 열거나 닫을 수 있다. 시속 45km까진 달리면서도 작동할 수 있다. 좌석 뒤 롤 바 돌기 사이엔 전동식 윈도를 달았다. 봉두난발을 만들 뒷바람을 막기 위한 방패다.
그런데 스위치를 당겨 닫아보니 절반 정도 올라오다 멈춘다. 기자를 지켜보고 있던 페라리 홍보담당이 빙긋 웃더니 “엔진 사운드를 최대한 즐기기 위한 절충점”이라고 귀띔한다.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는 이상 실내는 488 GTB와 같다. 계기판 한복판엔 타코미터를 커다랗게 심었다. 속도는 오른편에 디지털로 띄운다. 메뉴에 따라 다양한 정보를 띄울 수 있다.
볼로냐에 올 때마다 느끼지만 사방팔방이 맛깔스러운 드라이빙 코스다. 그저 작은 마을 사이의 길일 뿐인데, 어쩌면 그렇게 WRC 코스처럼 격렬하게 휘고 오르내리는지. 멋진 사진을 망칠 전봇대도 없다. 시승 또한 마음의 준비를 할 짬도 없이 곧장 휘몰이 장단으로 시작된다. 와이너리를 벗어나자마자 488 스파이더들이 우렁찬 포효와 함께 굽잇길로 핑핑 빨려 들어갔다.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는 670마력
넉 달 만에 다시 겪는 폭풍 가속. 지붕이 없으니 느낌은 한층 더 생생하다. 488 스파이더는 쿠페보다 155kg 무겁다. 전동식 하드톱 시스템의 무게인 셈이다. 이 때문에 무게배분도 40:60에서 41.5:58.5로 달라졌다. 하지만 시속 0→100km 가속 시간은 3.0초로 488 GTB와 고스란히 겹친다. 다만 시속 200km 가속은 8.7초로 488 GTB보다 0.4초 늘어진다.
따라서 배배 꼬인 국도에선 488 GTB와 가속의 차이를 느끼기 어렵다. 힘을 풀어내는 과정은 당연히 488 GTB와 같다. 자연흡기 방식의 458처럼 점진적으로 무르익어가며 뾰족하게 날카로워지는 쾌감은 없다. 터보 랙이 끼어들 틈 없이, 로켓을 쏘아올리듯 수직상승한다. 기승전결 없이 곧장 토크의 정점을 찌른다. 그래서 더 폭력적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이런 특성을 페라리는 ‘쉬운 운전’(effortless driving)이라고 정의한다. 요즘 수퍼카 브랜드들이 입 모아 강조하는 특징이다. 운전경험이 많지 않은 신흥 부자를 유혹하기 위한 묘안이다. 그래서 페라리는 새로운 세대로 진화할 때마다 힘과 연비를 높이되 전자장비도 한층 정교하게 마무리한다. 그만큼 조작과 반응 사이는 갈수록 아득하고 오묘해지고 있다. 좌우 방향의 움직임이 좋은 예다. 자기유체 서스펜션으로 롤을 다독이고, 전자제어식 디퍼렌셜로 요를 날카롭게 다듬는다. 페라리는 지난번 488 GTB를 선보이며 깨알같이 수치를 공개했다. 458 이탈리아보다 코너에서 최대한 버틸 수 있는 횡가속력은 6% 높고, 좌우로 기우는 각도는 13% 적다. 이 같은 장비가 운전의 수준을 높여주고, 또 수고를 덜어준다.
결과는 환상적이다. 해박한 지식과 농익은 실력 없이도 488 스파이더를 매일 타던 차처럼 쉽게 휘두를 수 있다. 게다가 스파이더는 좀 더 자극적이다. 488 GTB는 터빈의 금속성 회전음, 차체를 휘감는 바람결 소리가 도드라졌다. 반면 488 스파이더는 지붕을 여는 순간, 낯선 소리가 자취를 감춘다. 대신 엔진과 배기 사운드를 뭉친 바리톤 음색이 와락 들이친다.
특히 기어를 낮출 때마다 절묘하게 꺾이는 음색이 예술이다.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다운시프트에 탐닉하게 된다. 오르내릴 기어의 범위가 넓지 않은 저속 코너에선 마이너스 3단까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을 정도다. 코너에 들어서며 낮은 기어로 엔진을 달달 볶다 클리핑 포인트를 지나 펑펑 튀어나가는 과정은 아무리 반복해도 물리지 않는다. 중독성이 대단하다.
땅거미가 질 무렵, 488 스파이더가 하나둘씩 와이너리로 모여 들었다. 도착하고 나니 피로가 몰려왔다. 바람 샤워로 하루를 보낸 대가였다. 그러나 시야의 제한 없이 멋진 풍경을 감상하고 바람의 결을 온몸으로 읽는 즐거움과 맞바꿀 만큼은 아니었다. 누군가 페라리 488을 사겠다면 기자는 스파이더를 무조건 ‘강추’하겠다. 488 GTB의 성능을 유지하되 낭만까지 챙긴 걸작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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