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션: 마세라티 르반떼 타고 식재료 구해올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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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이탈리아 북부 알프스 산자락과 이웃한 브레시아에서 마세라티 르반떼를 만났다. 이번 출장의 테마는 라이프스타일 체험. 우린 르반떼를 몰고 시장통을 누볐다. 이렇게 사온 식재료로, 미슐랑 3스타 셰프인 마시모 부투라가 르반떼를 주제로 삼은 코스 요리를 만들어 내왔다. 르반떼 이름을 붙인 자동차와 요리, 모두 잊을 수 없다.
처음엔 우연인 줄 알았다. 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가 범상치 않다. 올드카가 잊을 만하면 어디선가 불쑥불쑥 나타났고, 어디론가 부지런히 달려갔다. 지난 5월, 이탈리아 북부의 브레시아를 찾았다. 알프스 산맥을 경계로 오스트리아와 이웃한 도시로서 금속 공예로 유명한 지역이다. 자동차 마니아에겐 밀레밀리아의 출발점으로 잘 알려진 곳이다.
마세라티의 야심찬 성장 이끌 견인차
공교롭게도 밀레밀리아 시작을 며칠 앞둔 시점이었다. 그래서 브레시아로 연결된 아우토스트라다엔 시쳇말로 민트급(새 것 못지않은 상태) 왕년의 명차를 가득 실은 트레일러가 유독 많았다. 기자는 밀레밀리아와 상관없이 브레시아를 방문했다. 마세라티 르반떼 때문이다. 그런데 시승은 아니었다. 마세라티는 “특별한 체험이 기다리고 있다”고만 귀띔했다.
이번 행사의 베이스캠프로 쓸 호텔은 마세라티가 통째로 빌린 듯했다. 아침 뷔페 테이블엔 뜬금없이 르반떼의 휠을 얹어 놨다. 로비 한쪽은 마세라티 컬렉션으로 장식했다. 책꽂이엔 마세라티의 역사를 기록한 책을 듬성듬성 꽂아뒀다. 여길 봐도, 저길 봐도 온통 마세라티다. 다만 어찌된 일인지 이번 행사의 주인공인 르반떼는 호텔 주위에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르반떼는 마세라티 최초의 SUV다. 지난 3월, 스위스 제네바모터쇼에서 갓 데뷔한 신차다. 기다림은 길었다. 마세라티는 2003년 쿠뱅 컨셉트로 SUV 시장 진출을 예고했다. 그러나 결실을 만나기까지 무려 14년이 필요했다. 마세라티의 꿈이 영그는 사이 많은 일이 있었다. 가령 금융위기가 세계 경제를 마비시켰고 모기업 피아트는 크라이슬러와 합쳤다.
부정적인 일만 있었던 건 아니다. 마세라티는 온갖 악재 속에서도 경이로운 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마세라티의 연간 판매는 2012년만 해도 6,000대로 페라리보다 판매가 적었다. 그러나 2018년 7만 대까지 끌어올릴 참이다. 르반떼는 이 원대한 꿈을 이루는 데 핵심 역할을 할 주역. 마세라티는 황당해 보이는 목표를 향해 차근차근 다가가는 중이다.
개인 박물관에서 만난 왕년의 마세라티
공식 프로그램은 이날 저녁부터였다. 그러나 이 먼 곳까지 날아와 하루를 빈둥거리며 보내긴 싫었다. 우린 프리몬트를 타고 모데나로 향했다. 한 시간 이상 달려 도착한 곳은 움베르토 파니니가 운영하는 사설 자동차 박물관. 치즈를 비롯해 유기농 식품을 만드는 농장 한쪽의 허름한 창고에 40대의 자동차와 60대의 모터사이클, 20대의 트랙터를 전시해 놓았다.
이 박물관의 주인장은 움베르토 파니니. 올해 85세인 그는 마세라티 엔지니어 출신이다. 마세라티가 어렵던 시절 창고에서 쏟아져 나온 양산차와 경주차, 컨셉트카를 사들인 그의 컬렉션은 놀랍도록 화려하다. 1934년형 6C 34, 1957년형 250F 등 값을 매기기 어려울 만큼 희소성이 높은 마세라티가 즐비했다. 메르세데스 300 SL 걸윙도 눈에 띄었다.
마세라티는 1914년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경주차 제작업체로 출발했다. 회사 이름은 창업자 형제의 성에서 따왔다. 마세라티는 1955년까지 경주차 한 우물만 팠다. 23개의 챔피언십과 32회의 F1 그랑프리 등 500여 개의 우승컵을 휩쓴, 소위 말해 ‘싸움닭’이었다. 그런데 1957년 250F로 월드 타이틀을 거머쥔 이후 돌연 마음을 바꿔 양산차 제작에 ‘올인’했다.
마세라티가 일반 판매용 차를 개발하는 과정은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호화 리무진이나 소형차에 욕심내지 않았다. 주특기인 경주차를 진화시켜 위험부담을 줄였다. 레이스카의 살벌한 성능을 밑바탕 삼되 단단히 뭉친 서스펜션의 근육을 풀어 승차감을 살렸다. 옆과 뒷좌석에 누군가 태우고 이곳저곳 쏘다녀야 할 테니 실내공간을 넓히고 짐공간도 챙겼다.
당시 귀족 스포츠였던 자동차경주에서 잔뼈가 굵었던 만큼, 마세라티의 타깃은 상위 몇 %의 부자. 첫 번째 결실은 경주차의 빼어난 성능과 고급차의 편안함을 겸비한 스포츠 쿠페, 3500GT였다. 오늘날 흔해빠진 무늬만 스포츠카가 아닌, 백전노장의 노하우가 담긴 진정한 스포츠카였다. 마세라티가 늘 ‘스포츠’를 핏대 올려 강조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지중해의 따뜻한 바람에서 가져온 이름
영광의 기억을 품은 채 잠든 왕년의 마세라티를 뒤로 하고 우린 모데나로 떠났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페라리 박물관도 함께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488 GTB 시승회 이후 몇 달 만에 찾은 페라리 본사 앞. 관람객이라곤 우리뿐이었던 마세라티 박물관과는 전혀 달랐다. 페라리 박물관은 버스가 잇따라 쏟아내는 관광객으로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였다.
해가 뉘엿뉘엿 기울 무렵 브레시아로 돌아왔다. 재킷을 챙겨 입고 호텔 로비에 내려오니 아침엔 보이지 않던 노랑머리 기자들로 북적였다. 우린 호텔 앞의 선착장에서 커다란 보트에 올랐다. 다국적 기자단을 태운 보트는 잔잔한 물살을 가로질러 호숫가의 높직한 망루 앞에 멈춰 섰다. 마세라티가 르반떼를 소개하기 위해 마련한 야외 특설 무대였다.
오붓한 오두막에 반짝이는 르반떼가 한 대 서 있었다. 뭉툭한 앞머리와 거우듬하게 부푼 지붕이 투구를 연상시켰다. 마세라티 홍보 담당이 말한다. “프리미엄 이탈리안 SUV엔 세 가지 특징이 있어요. 디자인, 특별함, 그리고 성능이죠. 르반떼는 지중해에 부는 따뜻한 바람을 뜻해요. 이 바람은 온화하다가도 종종 사나워지는데, 르반떼의 성격이 딱 그렇지요.”
마세라티는 기블리 플랫폼을 기반으로 르반떼를 개발했다. 그러나 모든 게 새롭다. 포장도로와 험로, 일상 주행과 실용성 등 다양한 재능을 섞고 뭉치기 위해서다. 이날 마세라티는 디자인을 설명하며 비율을 거듭 강조했다. 경주차처럼 보닛을 최대한 길게 뽑고, 캐빈은 뒤쪽으로 잔뜩 밀어냈다. 재규어가 F-페이스의 비율을 묘사한 설명과 판박이여서 흥미로웠다.
르반떼의 첫 인상은 강렬했다. 매서운 눈매와 쩍 벌린 흡기구가 포악스러웠다. 반면 뒷모습은 밍숭맹숭했다. 이유가 있었다. 맷집 좋은 SUV로 효율을 높이려면 공기저항이 걸림돌이 된다. 속도에 비례해 제곱으로 늘어나는 까닭이다. 이에 따라 르반떼는 공기저항계수(Cd)를 0.31까지 낮췄다. SUV 가운데 가장 낮다. 꽁무니 디자인에 힘을 빼고 동글동글 다듬은 결과다.
V6 3.0L 가솔린·디젤 총 4가지 엔진
마세라티는 르반떼를 개발하면서 기초부터 튼실하게 다졌다. 가령 차체는 주요 부위를 알루미늄으로 짜서 무게를 줄였다. 동시에 앞뒤 무게배분은 50:50에 맞췄다. 나아가 무게중심은 이 세상의 어떤 SUV보다 낮췄다. 경주차 제작으로 잔뼈 굵은 브랜드다운 접근방식이다. 아울러 차체 강성을 뼈대를 나눈 기블리보다 20% 높였다. 험로주행을 감안한 배려다.
현재 르반떼의 엔진은 네 가지로 전부 V6 3.0L다. 가솔린과 디젤 각각 두 가지씩이다. V6 3.0L 가솔린 직분사 트윈 터보 엔진은 430마력과 350마력 두 가지 출력으로 세팅했다. 430마력 버전의 경우 출력과 토크가 동급 최고 수준이다. 이 엔진을 품은 르반떼는 0→시속 100km 가속을 5.2초에 마친다. 최고속도는 시속 264km에 달한다.
가솔린 엔진은 페라리가 설계하고 만들었다. 마세라티가 ‘페라리의 심장’이라고 강조하는 이유다. 이 엔진은 휘발유를 200바(bar)의 고압으로 압축해 분사한다. 또한 최대토크를 2,000rpm 이하에서 뿜는다. 기블리 역시 이 엔진을 얹는데, 르반떼에 올리면서 출력을 20마력 더 높였다. 최대토크는 스포츠 모드에선 59.1㎏·m, 일반 모드에선 50.9kg·m이다.
350마력 버전은 좀 더 연비에 신경 쓰는 오너를 위해 준비했다. 최대토크는 430마력 엔진의 일반 모드와 같은 50.9kg·m. 뿜어내는 구간은 1,750~4,750rpm으로 살짝 빠듯하다. 350마력짜리 르반떼 역시 빠르다. 0→시속 100km 가속을 6초 만에 해치운다. 최고속도는 시속 251km로, 독일 프리미엄 자동차들의 최고속도 자율상한선을 보란 듯이 살짝 넘겼다.
이날 마세라티 홍보 담당은 “르반떼는 여느 프리미엄 SUV와 뚜렷이 다르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 근거로 기본 장비를 들었다. 르반떼는 전 모델에 ‘스카이 훅’ 기술로 완성한 에어 서스펜션과 마세라티 고유의 사륜구동 시스템 Q4가 기본으로 달린다. 또한 굉장히 높은 수준의 개인화 프로그램을 통해 세상에 하나뿐인 나만의 르반떼로 꾸밀 수 있다.
르반떼 타고 시장 돌며 식재료 쇼핑
이어서 마세라티의 오랜 파트너, 에르메네질도 제냐의 홍보 담당이 나섰다. 르반떼는 옵션으로 가운데 몸 닿는 부위에 제냐의 실크 원단을 씌운 시트를 고를 수 있다. 그는 누에고치까지 보여주며 실크의 장점을 설명했다. “실크는 최고의 천연소재에요. 100km 길이의 실크 무게가 고작 1kg밖에 안 된답니다. 아울러 불에 견디는 능력이 뛰어나지요.”
다음날 아침, 새벽부터 호텔 주위에서 심상치 않은 배기음이 웅웅거렸다. 우린 호기심을 가득 안고 로비에 모였다. 어젯밤 마세라티는 이번 행사의 미션을 공개했다. 마세라티는 이번 행사에 모데나에서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 ‘오스테리아 프란체스카나’를 운영 중인 셰프 마시모 보투라를 초청해 저녁 요리를 맡겼다. 우리가 거저먹는 건 아니었다.
우린 하루 종일 르반떼를 타고 브레시아의 시장과 농장을 돌며 식재료를 구해야 했다. 호텔 주차장에서 르반떼 운전석에 올랐다. 주최 측은 르반떼의 트렁크에 방문할 장소마다 쓸 장바구니와 쇼핑 리스트를 준비했다. ‘삼시세끼’ 같은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을 찍는 기분으로 르반떼를 몰고 나섰다. 날씨가 눈부시게 화창했다.
기자와 짝을 이룬 르반떼는 V6 3.0L 디젤 터보 엔진을 얹고 275마력을 낸다. 기블리와 콰트로포르테에도 얹는 엔진으로, VM 모토리란 회사가 공급한다. 이 엔진은 최대토크의 90%를 2,000rpm 이하에서 토해낸다. 그래서 가속 페달에 발끝만 스쳐도 힘이 용솟음친다. 성능도 흠잡을 데 없다. 0→시속 100km 가속을 6.9초에 마치고, 시속 230km까지 달린다.
그러면 뭐하나. 첫 번째로 방문한 시장은 출발 지점으로부터 딱 15분 거리였다. 이후의 동선도 길어야 하나당 30분을 넘지 않았다. 이번 출장을 오기 전 기사로 접한 르반떼를 손수 몰 생각에 굉장히 설레었는데 시승 시간이 이렇게 짧을 줄이야. 그나마도 주최 측은 “한국에선 디젤이 주력”이라며 가솔린 르반떼는 배정해주지 않았다.
미슐랭 스타 셰프가 르반떼 주제로 요리
때문에 찰나의 느낌도 소중히 곱씹었다. 르반떼는 환상적인 밸런스를 뽐냈다. 덕분에 무게중심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대응하기 좋았다. 시야도 시원시원하다. 또한 전반적인 운전감각이 부드러웠다. 그래서 뻣뻣하고 불편한 차를 부담스러워하는 여성도 쉽게 적응할 수 있다. 그건 마세라티의 계산이기도 하다. 마세라티는 르반떼로 여성 고객의 비율을 늘릴 참이다.
현재 유럽에서 마세라티의 여성 고객 비율은 8%. 북미는 이보다 훨씬 많은 13%다. 전세계 고급차 업계가 눈독 들이는 중국 시장은 무려 35%나 된다. 빵빵하고 매끈한 디자인, 에르메네질도 제냐 원단을 씌운 시트, 편안한 승차감 모두 궁극엔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미끼다. 물론 강렬한 가속감과 자극적인 사운드 등 마세라티만의 특징도 빠짐없이 챙겼다.
늦은 오후, 우린 미션을 완수하고 호텔로 돌아왔다. 짧아서 더 아쉬운 시승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동행한 기자가 운전한 시간을 빼면 실제 기자가 운전대를 쥔 시간은 채 한 시간을 못 넘겼다. 이날 식재료 리스트는 사실 필요 없었다. 미리 약속된 상점에선 준비된 재료를 알아서 장바구니에 챙겨줬다. 짜고 치는 고스톱 같아서, 하지만 그래서 더 예능 프로그램을 찍는 기분이 들었다.
이날 저녁, 마시모 보투라 셰프는 우리가 공수해온 오이와 오렌지, 피망, 렌틸콩 등의 재료로 만든 요리를 내왔다. 미슐랭 스타 셰프의 요리를 맛본 건 지난해 벤틀리 벤테이가 출장 이후 두 번째. 달인의 요리엔 공통점이 있었다. 우선 창의적이다. 아울러 맛이 복합적이다. 여러 풍미가 어우러져 하나의 맛을 완성한다. 그래서 씹는 내내 집중하고 음미하게 된다.
마시모 보투라는 유년 시절의 추억을 소개했다. “저처럼 모데나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엔진음만 듣고도 무슨 차종인지 맞추죠. 마세라티의 사운드는 한번 경험하면 잊을 수가 없어요. 어머니의 특제 라자니아에서 제일 맛있는 겉껍질처럼 말이죠.” 이 말을 마치고 그는 라자니아의 껍질만 오롯이 접시에 담아냈다. 아삭한 식감이, 왠지 르반떼를 모는 느낌과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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