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밴 같은 미국산 SUV, 혼다 파일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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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다 라인업에서 가장 대형 SUV인 파일럿이 풀모델 체인지되었다. 브랜드는 일본회사일지라도 파일럿은 3세대에 이르는 내내 기획과 생산 모두 미국에서 진행된 사실상의 ‘미국차’다. 미국 패밀리카의 가치기준이 된 일본차는 과연 한국 시장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잘 팔리던 차가 풀 모델 체인지를 한 뒤 판매량이 뚝 떨어지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누가 봐도 명확한 경우가 있으니 그건 차가 못생겨졌을 때다. 뒤늦게 트렌드를 타려는 시도가 되었든, 일대 혁신을 추구한 경우가 되었든 수많은 결정을 거친 차가 객관적으로 못생겨지는 경우는 자동차 업계에 비일비재하며, 그 중 하나가 바로 구형인 2세대 파일럿의 변화였다. 세련되지도, 그렇다고 터프하지도 않은 박스형 SUV는 볼 때마다 그 어정쩡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전성기 때 한해 15만 대가 팔리던 차가 10만 대로 뚝 떨어졌을 때 혼다도 깨달았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게’ 생겨도 10만 대는 팔려주는 차가 파일럿이라는 이야기도 성립된다. 미국인의 생활습관을 철저히 연구한 공간과 여유로운 장비, 높은 기계적 신뢰도에 동급 최고의 충돌안정성과 덕분에 파일럿은 이제 미국 중산층 사커맘을 대변하는 차가 되었다.
2세대의 못생김에서 벗어나다
다행히도 새로 나온 3세대 파일럿은 전혀 못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잘생긴 편에 속한다. 혼다 SUV의 익숙한 디자인 패턴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전면만 보았을 때는 조금 커진 CR-V정도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차의 크기를 제대로 인식하게 되는 것은 측면을 보고 나서다. 20인치의 휠 사이즈조차 그다지 커 보이지 않을 정로도 루프 라인이 길게 이어져 후부의 커다란 오버행에서 마무리된다. CR-V와는 비교할 수 없이 큰 차다.
오버행이 커다랗게 튀어나온 것은 역시 3열 시트 때문. 넉넉한 3열 시트를 넣는 것으로 미니밴이나 가능할 8명의 탑승인원을 자랑한다. 3열 시트는 물론 접고 펼 수 있으며 잠깐 앉는 용도의 간이시트가 아닌 본격적인 장거리 여행용으로도 충분하다. 구형에서는 약간 비좁다 싶던 무릎공간도 충분해져 성인 남성이 타고 여행하는 데 별 무리가 없을 정도다. 단 이것은 2명이 탈 때로 한정되며, 리어 휠하우스가 좌석공간을 먹고 들어와 성인 3명이 앉기에는 아무래도 비좁은 편이다. 탑승은 의외로 쉬운 편으로, 측면의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2열 시트의 한쪽이 앞으로 접히면서 진입에 충분한 공간이 생긴다. 2열은 미니밴 정도의 공간감이 특징이며 넓고 평평해서 성인 3명도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다. 사방에 달린 컵홀더는 물론이고 USB 포트가 곳곳에 배치된 데서 요즘 차의 분위기가 물씬 느껴진다.
동급 최저 수준의 품질감이 인상적이던 2세대에 비하면 신형의 내장재 질감은 황송할 정도다. 계기판과 대시보드는 현행 어코드와 CR-V의 디자인 테마를 공유한다. 다소 평범한 계기판과 콘솔에 비해 특이한 것은 안드로이드 기반의 8인치 터치식 디스플레이. 와이파이 테더링까지 마치면 웹 브라우징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앱 설치도 가능하지만 구글 플레이 스토어가 막혀 있어서 실제 설치는 제한적이다. 만약 안드로이드폰 화면을 그대로 표시하고 싶다면 센터콘솔 하단의 HDMI 포트를 이용하면 된다.
풍요로운 공간과 장비
스티어링은 최근의 차들이 모두 그렇듯이 전동식 파워스티어링 방식. 전반적으로 가벼운 것을 빼고는 큰 이질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달리다보면 스티어링에 직접 개입하는 여러 가지 안전장치가 인상적이다. 스티어링이 도로의 안쪽 실선이라도 밟게 되면 도로이탈방지 시스템이 가벼운 진동으로 이를 알려주며 심지어 부드럽게 스티어링을 반대로 이끌기까지 한다. 스마트 크루즈 컨트롤은 기본이며, 추돌 상황이라 판단되면 스스로 브레이크를 작동시킨다. 우회전 시그널을 켜면 우측 사각지대를 자동으로 화면에 비추는 레인 와치 기능은 덩치큰 SUV에서 그 유용함이 배가된다.
길이가 5m가량 되는데다가 댐퍼 스트로크가 긴 SUV답게 느긋한 승차감이 매력이다. 거칠게 몰아붙일 이유가 적은 차이지만, 출력이 필요한 때는 넉넉한 힘으로 화답한다. 3.5리터 V6 엔진은 전작을 개량한 듯하지만 사실은 직분사 시스템을 넣고 새로 만든 것이다. 출력은 30마력 늘었고, 변속기는 1단이 추가된 6단. 여기에 무게를 140kg 가량 줄이면서 전체적인 운동성능이 높아졌다. 0→시속 100km 가속시간은 6.2초로 이전 모델에 비해 2초 가량 빨라졌을 뿐만 아니라 비슷한 종류의 3리터급 SUV에 비해서도 무척 좋은 가속 능력을 가졌다.
여유로운 동력성능은 온로드뿐만 아니라 오프로드 성능까지 끌어올렸다. 오프로드에 던져넣은 차는 8인승 SUV임에도 불구하고 4륜구동 시스템의 위력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이런 전륜구동 기반 SUV에는 기대하기 힘들었던 험로 전용 지형반응 시스템까지 갖추었다. 노면 상태에 따라 눈/모래/진흙 모드를 골라서 달릴 수 있는 시스템은 두 배는 비싼 차에서나 손에 넣을 수 있던 기능이다. 딱히 길이랄 것도 없는 마른 하천을 달리며 오랜만에 SUV 본연의 즐거움을 만끽했다.
다운사이징은 어디에
직접 경험한 신형 파일럿은 높은 완성도를 갖춘 차다. 구형에서 느꼈던 실망은 깨끗하게 걷어냈다. 구태를 벗어난 디자인에 훌륭한 품질감, 어지간한 미니밴을 대체하기 충분한 사이즈와 승차감도 갖추었다. 액티브 세이프티 장비도 빠짐없이 다 넣었다. 디젤엔진이 없는 것조차 큰 단점이 되지 않는다. 휘발유 엔진의 부드러움과 정숙성을 위해 비용을 지불할 소비층이 충분하다는 것은 이미 이 시장의 맹주 익스플로러 판매량에서 증명한 바 있다. 유일한 걸림돌은 파워트레인 정도. 3.5리터 V6 엔진의 부드러운 파워와 6단 변속기의 성능은 이 차의 성격과 대단히 잘 맞긴 하지만, 이건 북미 시장의 기본 요구사항이며 한국은 사정이 다르다. 이미 9단 자동변속기가 장착된 파일럿이 북미 시장에서 시판되고 있으며, 다운사이징용 신형 1.8L 터보 엔진이 혼다의 라인업에 곧 확대 적용될 것이라는 소리도 들린다. 한국 시장에 어울리는 파워트레인이 어느 쪽일지는 두말하면 잔소리. 좋은 차에 좋은 엔진과 변속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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