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탈 수 있는 랠리카, 푸조 308 GT 시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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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차를 시승하다보면 유독 연이 닿지 않아 좀처럼 타볼 기회가 안 생기는 차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거의 대부분의 트림과 라인업을 섭렵할 정도로 여러 번 시승 기회가 주어지는 차도 있다. 필자의 경우는 유독 푸조 308과 인연이 깊다.
처음 308 SW 2.0을 시승한 이래로 308 해치백 1.6, 308 SW 1.6을 순서대로 타 봤다. 특히 롱텀 시승차였던 308 SW 1.6을 타고서는 2,000km가 넘는 거리를 달리며 전국 일주를 다녀오기도 해, 이제는 거의 "내 차"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조작 방법이며 주행감각이 매우 친숙하다.
그런데 이번에 또 308을 시승했다. 게다가 빨간색이다. 4번의 시승 중 3번이 빨간색이었다. 먼저 든 생각은 "또 308이야?" 이제 트립 조작이나 블루투스 연결은 차에 타자마자 헤매지 않고 할 수 있을 정도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만만히 볼 수는 없다. 이번에 탄 차는 무려 GT라는 호칭을 수여받았다. 푸조로서는 2009년 207 RC 단종 이래로 7년 만에 한국에 다시 선보이는 스포츠 모델이다. 어딘가 사나운 인상에 더 강력한 심장도 얹었으니 핫해치에 성큼 가까워졌다. 과연 308 GT는 네 번째 만남에도 불구하고 설렐 수 있는 차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물론"이다.
푸조가 모터스포츠 명가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1894년 인류 최초의 자동차 경주에서 우승한 것도 푸조 자동차였고, 이후 오늘날까지도 월드 랠리 챔피언십과 르망 24시 내구레이스, 파이크스 피크 힐클라임, 파리-다카르 랠리 등에서 화려한 전적을 쌓아 왔다. 푸조를 타면 느낄 수 있는 탄탄한 기본기는 모두 모터스포츠에서 다져진 것이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뻥연비"라고 불릴 정도로 뛰어난 연비와 대조적으로 고성능 모델을 만나기는 어려웠다. 컴팩트한 스포츠 모델, 그것도 비독일 수입차가 선전하기는 쉽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시장의 분위기가 반전됐고 지난 해 푸조는 7,000대를 팔아 사상 최고의 실적을 올리며 인지도도 크게 높아졌다. 이제는 푸조도 스포츠 시장을 노려볼 만 한 것이다.
조금은 기대가 컸던 탓일까, 처음 마주한 308 GT는 조금 심심해 보였다. 푸조 엠블렘이 격자무늬 라디에이터 그릴 속으로 들어오고 안개등이 공기흡입구로 바뀐 것 외에 앞모습에서는 큰 차이점을 찾기 어렵다. 범퍼 디자인도 기존 308 2.0 모델과 동일하다. 헤드라이트는 풀 LED 타입이며 방향지시등은 아우디에서나 보던 다이내믹 타입이 적용돼 흘러가는 형태로 작동한다.
휀더와 라디에이터 그릴, 트렁크 리드에 GT 엠블렘이 부착되고 사이드 스커트가 더해져 옆모습은 조금 더 무게감이 있다. 휠 역시 18인치 다이아몬드 커팅 휠이 적용되며, 타이어는 225/40 R18 사이즈의 미쉐린 PS3다. 루프와 사이드미러 커버는 바디 컬러와 상관없이 검정색으로 처리된다.
뒷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범퍼 하단에는 검은색 디퓨저가 적용되고 사각형 형태의 듀얼 머플러 팁이 장착돼 '센 놈'임을 암시한다. 테일게이트 상단에 스포일러 정도는 적용했어도 좋지 않을까? 동급의 유력한 경쟁상대인 폭스바겐 골프는 스포츠 버전인 GTD에 확연히 차별화된 디자인을 제공하는데, 그에 비해 심심한 308 GT의 스타일은 조금 아쉬움이 남는다.
유럽에는 GT보다 더 강력한 308 GTi도 있는데, 이 모델조차도 라디에이터 그릴과 리어 디퓨저 외에는 큰 차이점이 보이지 않는다. 308의 기본 디자인 완성도가 뛰어난 까닭도 있지만, 그럼에도 많은 고성능 소비자들은 자신의 애마가 더 돋보이기를 원한다. 과하지 않은 선에서의 디자인 차별화가 요구되는 이유다.
실내 역시 기본 모델과 큰 차이는 없다. 푸조만의 독특한 i-콕핏 인테리어는 308 GT에서도 그대로다. 사실, 일반 308도 굉장히 진보적이고 스포티한 인테리어를 선보였기 때문에 더 차이점을 찾기 힘든 것이다.
도어 트림을 비롯해 실내 곳곳에는 레드 스티치가 추가됐고, 시트는 스포츠 타입에 알칸타라가 씌워졌다. 시트 조작은 수동이지만 전동식 요추받침이 제공된다. 1열에는 마사지(라고 부르기 민망한 압력이기는 하다) 기능도 탑재된다.
운전석에 앉으면 좀 더 차이가 뚜렷하게 보인다 레드 스티치와 타공 가죽이 적용된 스티어링 휠 상단에는 경주용 차처럼 세로로 나눠진 디자인이 적용되고, 스티어링 휠 하단에는 반짝이는 GT 엠블렘이 부착된다. 메탈 페달과 레드 스티치가 적용된 시프트 노브까지, 모든 조작장치에 액센트를 더해 운전자를 자극한다.
2열 공간은 오랫동안 탔던 308 SW에 비하면 좁지만 여전히 성인남성이 타기에는 충분하다. 트렁크 역시 일상용도에 충분한 수준이고, 60:40 폴딩과 스키스루 기능을 제공해 상당히 활용도가 높다. 명불허전 소형차 명가인 푸조답다.
i-콕핏의 편리성에 대해서는 이제 두 말하면 입 아플 정도. 매우 작고 직관적인 스티어링 휠과 그 너머의 계기판 클러스터, 운전석을 향해 기울어져 있는 대형 터치 디스플레이 등 모든 면이 매력적이다. 다만 미니멀리즘의 희생양이 된 부족한 수납공간과 하나뿐인 컵홀더도 그대로다. 몇 번이나 타봐도 휴대폰 하나, 음료수병 하나 놓을 공간도 마땅찮은 실내 배치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추후 부분변경 시에 개선될 수 있는 부분이니 기대를 걸어본다.
"생각보다 별로 다른게 없네?" 좋게 말하면 예상대로인, 나쁘게 말하면 큰 감흥 없는 만남이다. 소개팅에서 만난 사람과 네 번째 데이트인데 옷만 갈아입었을 뿐 설레는 변화를 찾지 못한 기분이다. 이대로 이번 만남도 끝인가-라고 생각할 무렵 새로운 엔진이 눈에 들어온다.
308 GT의 심장은 2.0L BlueHDi 엔진. 최고출력은 180마력, 최대토크는 40.8kg.m에 달한다. 이는 한국에 수입 중인 푸조 전 라인업 중 가장 강력한 것이다. 유럽에는 205마력을 내는 1.6 THP 가솔린 터보 모델도 존재하지만, 아직까지 국내 수입 계획은 없다. 어쨌거나 동급 경쟁자들과 견줘도 손색없는 출력과 풍부한 토크가 강점이다.
여기에 맞물리는 변속기는 아이신과 함께 개발한 EAT6 6속 토크컨버터. 일상 주행에서의 부드러움을 강조하면서도 DCT 못지 않은 직결감이 탁월한 변속기다. 유럽에서도 308 GT 디젤에는 EAT6 자동변속기만 조합된다. 효율과 변속충격을 모두 잡기 위해 만들어진 변속기지만 퍼포먼스 역시 부족하지 않다는 방증이다.
노멀 모드에서의 일상 주행은 그렇게 자극적이지는 않다. 최대토크가 2,000rpm부터 뿜어져 나와 초반 스타트에서는 약간의 터보래그도 느껴지지만 거슬릴 정도는 아니다. 스티어링 휠은 여성 운전자에게도 부담스럽지 않을 만큼 가볍고, 변속기와 가속 페달도 신경질적이지 않다. 스포츠 모델이라는 것을 깜빡할 정도다. 스포츠 핫해치로 정평이 난 미니 쿠퍼나 골프 GTD가 일상에서도 꽉 조여진 느낌을 주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대신 일상에서는 지극히 안락하고 고급스럽다. 푸조 특유의 걸러낸 듯하면서도 기민한 서스펜션 응답성은 그대로고,경쟁자들보다 훨씬 우수한 NVH 대책도 돋보인다. 풍절음도 엔진음도 상당히 억제돼 주행 중에는 가솔린만큼 조용하다. 그렇다, 모든 스포츠 모델이 반드시 항상 피곤할 필요는 없다.
조금 더 제대로 주행성능을 확인하기 위해 와인딩 로드를 찾아갔다. 그리고 주행에 앞서 스포츠 모드를 켰다. 순식간에 계기판이 붉게 물들고, 트립컴퓨터에는 출력 게이지 또는 G-센서가 표시된다. 또 굵직한 스포츠카 사운드가 실내에 울리기 시작한다.
산길을 내달리기 시작하자, 지금까지 보여줬던 아기자기한 모습을 잊을 정도로 스포티한 드라이빙이 시작된다. 드디어 '심쿵'할 만한 반전매력을 선보이는 것이다. 묵직한 스티어링 휠은 어느 속도영역에서도 예리한 핸들링을 보증하고, 지금까지 한 템포 느렸던 액셀러레이터 반응은 가솔린 엔진 못지 않게 빨라졌다.
변속기 기어비가 결코 촘촘하지 않음에도 뿜어져 나오는 출력과 토크가 1,500kg에 못 미치는 차체를 무섭게 밀어붙인다. EAT6 변속기는 DCT만큼 번개같지는 않지만 충분히 민첩하게 변속을 해낸다. 다운시프트 시에도 망설임 없이 회전수를 높이며 적극적으로 엔진 브레이크를 활용한다. 0-100km/h 가속은 8.4초면 마무리되고 최고속도는 220km/h에 이른다.
압권은 코너링이다. 유압식 댐퍼는 코너에서 힘껏 차체를 받쳐 올리고, 코너를 파고드는 순간에는 전륜구동차가 아닌 것처럼 리어가 뒤따른다. 언더스티어를 느낄 새도 없이 가속 시에는 코너 안쪽으로 빨려들어가듯 치고 나간다. 무거운 디젤 엔진이 무색하다. 망설임 없는 날카로운 거동에 코너를 돌 때마다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다.
가속, 코너링은 물론 제동까지 전체적인 밸런스가 탁월하다. 대형 1-피스톤 캘리퍼는 다운힐에서도 강력한 제동력을 보장하고, 노면이 안좋은 곳에서도 서스펜션은 불안함을 찾아보기 어렵다. 여유로운 그립력의 PS3 타이어도 시종일관 안정된 그립력을 제공한다. 스포츠 모드를 켜고 끔에 따라 차의 성격이 완전히 뒤바뀌는 것이다. 조금 전까지는 평범한 해치백이었지만, 이제는 랠리카를 타는 기분이다.
물론 경쟁자들이 선보이는 "기교"의 측면에서는 조금 뒤쳐지는 것이 사실이다. 가령 스티어링 기어비를 좁혀 카트같은 코너링을 제공한다거나, 브레이크로 좌우 구동력을 조절해 코너링을 높이는 전자제어 말이다. 하지만 그런 것 없이도 308 GT의 탄탄한 기본기는 충분히 다이내믹한 드라이빙을 선사한다. 하드웨어적 측면에서 부족한 점을 찾기 어렵다.
공인연비는 복합 14.3km/L(도심 13.6km/L, 고속 15.2km/L)이다. 시승 간 복합연비는 공인연비와 비슷한 수준이었고, 도심 주행에서는 13.0km/L, 고속 주행에서는 16.6km/L을 기록해 고속 주행에서 더 뛰어난 측면을 보였다. 중요한 것은 이 정도 재미를 주는 차가 이 정도 연비를 기록한다는 점이다. 매일 매일 타도 부담이 없다.
이 밖에 앞 차와의 거리를 유지해 주는 액티브 크루즈 컨트롤과 비상 충돌 경고 시스템, 비상 충돌 제동 시스템 등 선호도 높은 편의 및 안전 사양에도 충실하다. 비슷한 운전 재미를 기대할 수 있는 미니 쿠퍼 SD나 폭스바겐 골프 GTD와 비교했을 때 상품성 면에서 상당히 우위를 점한다. 게다가 예쁘고 잘 달리기까지 하니 미워할 구석이 없다.
308 GT를 한 줄로 표현하자면 "매일 탈 수 있는 랠리카"다. 왕년에 세계 랠리 무대를 재패했던 푸조답게 308 GT는 불필요하게 딱딱하지 않으면서도 예리한, 랠리카같은 움직임을 자랑한다. 다른 어떤 경쟁자와도 확실히 차별화된 감각이다. 게다가 우수한 연비와 뛰어난 편의사양까지 있어 매일 타기에도 전혀 피곤하지 않고 부담스럽지 않다.
308 GT는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화려하지 않은 겉모습에 실망했든 스스로가 조금 부끄럽다. 지난 만남들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308은 갖고 싶은 매력을 발산했다.
다만 바라건대 휘발유 엔진과 수동변속기가 달린, 더 강력한 308들을 만났으면 한다. 디젤과 자동변속기로도 이렇게 재미있는데 205마력의 308 GT, 250마력과 270마력을 내는 308 GTi는 얼마나 더 아찔할까? 한정판으로라도 만나고 싶을 정도로 이제는 308의 매력에 푹 빠졌다. 푸조 308 GT의 국내 출시 가격은 4,145만 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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