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 그리고 강력한 도전자 - 911 카브리올레 vs F-타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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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넘게 최고의 스포츠카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포르쉐 911. 지금 보고 있는 코드네임 991 mk2는 그 진화의 결정판이다. 자연흡기 엔진을 버리고, 기본형 카레라부터 터보가 달린다. 엔진 효율을 높이기 위한 결정이었다. 포르쉐는 이를 ‘라이트 사이징’(Right sizing)이라고 부른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1998년 등장한 코드네임 996에 34년간 유지해온 자신들만의 DNA인 공랭식 엔진을 버리고 수랭식 엔진을 얹는 모험을 감행한 포르쉐다. 당시 새롭게 설계한 플랫폼에 터진 달걀 프라이 같은 헤드램프를 달았다가 골수팬들로부터 비난을 사기도 했다. 덕분에 공랭식 엔진을 쓴 마지막 911인 코드네임 993의 중고차값이 오르는 기현상이 발생하기도 했다.
996은 디자인적으로는 실패했을지 모르지만, 911이 스포츠카의 교과서로 자리잡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포르쉐는 후속모델 997에 동그란 헤드램프를 다시 도입했다. 996은 못생긴 헤드램프 때문에 아직도 미운 오리새끼 신세다. 하지만 새 플랫폼은 개량을 거듭하며 997로 이어졌고, 2012년까지 그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다.
성능과 효율을 한층 끌어올린 수랭식 엔진은 오늘날까지 건재하다. 2012년 출시된 코드네임 991은 996 이후 다시 한번 새롭게 변신했다. 휠베이스가 10cm 늘고, 뒤 오버행도 대폭 줄었다. 길고 넓어진 차체 덕분에 한결 다이내믹한 모습을 지랑한다.
엔진이 파격적으로 달라진 만큼 911 카레라 S 카브리올레의 시승 포인트는 새로운 터보 엔진이 될 것이다. 기존의 자연흡기 엔진보다 최고출력이 20마력 올라가고, 연비까지 좋아졌다고 한다. 또한 지붕을 열고 달릴 수 있는 컨버터블의 매력 중 하나는 애마의 엔진음을 생생하게 들을 수 있다는 점이다. 얼마나 즐거울까? 기대가 크다.
결론부터 말하면 더 즐겁진 않다. 물론 ‘라이트 사이징’은 갈수록 엄격해지는 환경규제를 충족시키는 동시에 엔진효율과 성능을 높이기 위한 이성적 접근이었다. 그 과정에서 ‘즐거움’이라는 감성적인 부분도 최대한 유지하고자 했다. 100% 흡족하지 않지만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0→100km/h 가속성능, 최고출력 및 최대토크, 연비 등 모든 부분에서 성능향상을 이끌어냈다. ‘포르쉐 노트’라 불리는 포르쉐 엔진 특유의 걸걸한 사운드도 잘 살려놨다.
그런데 911 카레라 S 카브리올레는 안타깝게도 필자가 기대했던 가래 끓는 ‘포르쉐 노트’가 잘 들리지 않았다. 실내에선 다이슨 진공청소기 돌아가는 것마냥 쉬익~ 하는 엄청난 흡기음이 도드라질 뿐이다. 처음엔 황당했다. 자동차에 문외한인 동승자는 “트렁크 밑에 빗자루가 낀 것 아니냐”고 묻기도 했다(911 엔진이 뒤에 달렸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이다).
메탈릭한 배기음은 밖에서 더 잘 들린다. 신형 911의 꽁무니를 따라가거나 옆으로 지나갈 땐 ‘포르쉐 노트’가 살아 있다. 그러나 실내에선 진공청소기 소리에 묻혀버린다. 남에게 선사하는 즐거움을 남겨둔 대신, 나를 위한 즐거움이 조금 줄었다. 개선된 성능과 연비로 위안을 삼을 수밖에. 청소기 소리가 좋다면 최고의 선택이다. 이것만 제외하면 완벽하다. 우리가 기대하는 911 그대로다. 약간의 터보랙이 있지만 스포츠 모드 혹은 스포츠 플러스 모드에선 똑똑한 PDK 변속기가 회전수를 항상 높게 유지해 터보랙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레드존도 7,500rpm부터다. 최고출력이 나오는 6,500rpm을 넘어도 시원스레 돌아간다. 엔진 회전수가 낮아지지 않은 점은 정말 만족스럽다.
주행감각은 말 그대로 ‘스포츠카의 교과서’다. 차체가 매우 안정적이고, 너비 305mm의 뒤타이어는 노면을 꽉 움켜쥐고 절대 놓아주지 않는다. 시승차엔 ‘리어액슬 스티어링’(Rear-Axle Steering) 기능이 달렸지만, 일부러 얘기해주기 않으면 눈치채기 힘들다. 움직임이 자연스럽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차가 앞으로 나가려는 성향이 강하다. 그만큼 안정성이 뛰어나 차를 믿고 빠르게 달릴 수 있다는 말이다. 짜릿함은 떨어진다.
새로운 포르쉐 911은 성공적으로 진화했다. 터보 엔진을 사용해 성능과 효율을 모두 얻었다. 엔진 사운드가 약간 아쉽지만, 그것만 제외하면 흠잡을 것이 없다. 심지어 공회전 방지장치(Idling Stop & Go, ISG)까지 완벽하게 작동한다.
차가 완전히 멈추기도 전에 시동이 꺼지고, 미동도 없이 재빠르게 시동이 걸린다. 인테리어의 질감과 디자인도 뛰어나고, 한글과 애플 카플레이(Car Play)까지 지원되는 새로운 내비게이션 시스템도 만족스럽다. 이성적인 독일인이 만든 차답다.
이번엔 영국산 스포츠카를 타보자. 재규어 F-타입은 생김새부터 남다르다. 짙은 녹색의 브리티시 그린으로 본성을 감추고 있지만, 쭉 찢어진 범퍼 하단의 흡기구와 날카로운 헤드램프가 한 성깔 하는 재규어의 성격을 짐작케 한다.
차체 옆면을 타고 흐르는 곡선은 뒷바퀴 부근에서 부풀어 오르며 스포츠카로서의 강력함을 암시한다. 이것은 재규어 스포츠카의 계보를 잇는 상징이기도 하다. 한눈에 턱시도를 차려입고 본색을 감추고 있는 007영화 속의 영국 악당 같다.
시동 버튼을 누르면 찢어질 듯 날카로운 배기음으로 성깔을 드러낸다. 포르쉐 911이 잘 조련된 경주마 같다면, F-타입은 맹수다. 문을 열면 타고 내리기 쉽게 시트가 뒤로 밀리며 운전자를 환영하는 911과 달리, F-타입은 무뚝뚝하다. 하지만 높이 솟은 문턱을 넘어 몸을 구겨넣으면 훌륭한 시트가 반긴다. 단단하고 높은 옆구리 지지대 때문에 타고내릴 때 조금 불편하지만, 몸을 잘 잡아준다. 소재와 디자인도 훌륭해 실내가 훤히 보이는 컨버터블로 제격이다.
꼼꼼하게 따지고 보면 실내 품질은 911에 비해 뒤진다. 일부 버튼은 누르는 감촉이 좋지 않고, 센터콘솔, 글러브박스 등은 경박하게 여닫힌다. 공조장치를 누르면 스르륵 올라오는 중앙 에어벤트는 영국차라는 선입견 때문인지 지레 ‘고장나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을 하게 만든다.
계기판 중앙의 다기능 디스플레이는 포르쉐처럼 달리는 데 필요한 정보를 친절히 보여주지 않는다. 수온, 유온, 유압 등 엔진상태를 모두 알려주는 911과 달리, F-타입은 연비가 좋지도 않으면서 주행가능거리, 연비 같은 주행에 필요한 기본정보만 띄운다.
그러나 이런 단점들은 달리기 시작하면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우선 배기음이 끝내준다. 911과는 비교불가다. 엔진 회전수가 4,000rpm을 넘어가면 엄청난 음량을 토해낸다. 찢어질 듯 울부짖는 독특한 배기음에 가슴이 뻥 뚫린다. 지붕을 열고 터널에서 들으면 그 감동이 배가된다.
6기통 엔진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이면서 박력 있는 배기음이 아닐까 싶다. 가속페달에서 발을 떼면 사정없이 콩을 볶는 백파이어 소리를 낸다. F-타입은 너무도 매력적인 배기음을 즐기기 위해서라도 컨버터블을 고를 가치가 있다.
달리는 맛도 911을 압도한다. 안정적인 911과 달리 F-타입의 몸놀림은 무척 자극적이다. 독일산 라이벌에 비해 더 극적이기까지 하다. 록투록 (Lock-to-lock)이 2.2회전에 불과한 스티어링은 아주 민감하다. 한손으로 주행하며 잠시 한눈 팔면 순식간에 차선을 넘나든다.
코너를 돌 때엔 머리가 안쪽으로 쑥쑥 파고든다. 아무 생각 없이 스티어링 휠을 돌리면 당황할 정도다. 운전자에 따라선 예민하고 과격한 몸놀림에 공포를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운전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스트로크가 긴 가속페달로 강력한 엔진을 살살 다스리며 코너를 돌아가는 묘미가 상당하다.
재규어 F-타입 S AWD 컨버터블은 네바퀴굴림이지만 뒷바퀴굴림 스포츠카같이 움직인다. 유턴할 때나 한계상황까지 몰아붙이지 않으면 네바퀴굴림을 눈치채기 쉽지 않다. 한계상황에선 IDD(Intelligent Driveline Dynamics)라는 이름의 AWD와 토크 백터링이 작동해 최적의 접지력을 확보한다. 고속으로 코너에 진입해 코너 바깥으로 밀릴 것 같은 상황에서도 머리가 안쪽을 파고들며 접지력을 확보한다. 때론 이질적이지만, 익숙해진다면 빠르게 달릴 수 있을 것 같다.
묵직한 포르쉐 911과 달리 F-타입은 가속할 때의 느낌도 가뿐하다. 론치컨트롤 기능을 써서 급가속하면 노면상태에 따라 네바퀴 휠스핀이 발생할 정도다. 반면 911 카레라 S 카브리올레는 뒷바퀴만 굴리지만 좀처럼 휠스핀을 일으키는 법이 없다.
신기한 것은 S AWD 컨버터블이 911 카레라 S 카브리올레보다 무려 200kg이나 무겁다는 점이다. 하지만 달릴 땐 F타입이 200kg 이상 가볍게 느껴진다. 세팅에 따라 이런 상반되는 느낌을 선사하는 것이 바로 스포츠카다. 그래서 자동차는 숫자가 다가 아니다. 달려봐야 안다.
포르쉐 911을 따라잡으려는 후발주자 재규어 F-타입은 방향을 제대로 잡았다. 수십년간 스포츠카의 왕좌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911인만큼 자금난에 시달리다 이제야 숨통이 트인 재규어가 하루 아침에 따라잡기에는 버거운 상대다. 따라서 숫자보단 감성에 초점을 맞추는 쪽이 낫다. 스포츠카의 고객들은 차가 가져다주는 즐거움과 삶의 풍요로움을 사는 것이지 숫자를 사는 것이 아니다.
물론 F-타입은 성능, 연비, 실용성 등 대부분의 수치에서 911을 넘어서지 못했다. 하지만 환상적인 배기음과 운전의 즐거움은 911을 압도한다.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디자인도 매력적이다.
이것저것 따지는 보통사람은 911을 선택하는 쪽이 후회가 적을 것이다. 하지만 즐거움을 위해 스포츠카를 타려는 사람에게는 F-타입이 더 어울린다. 훨씬 짜릿하면서 값도 수천만원 싸다. 후발주자지만, 흔들림 없이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재규어 F-타입에서 ‘keep calm and carry on’으로 대표되는 영국인이 연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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