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스로이스 던과 함께한 새벽부터 황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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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톱, 수퍼 럭셔리 모터링의 새 시대를 열었다는 롤스로이스의 ‘새벽’을 맞이하러 남아공으로 향했다
지난 3월 하순, 남아프리카 공화국 스텔렌보쉬에서 롤스로이스의 새로운 4인승 컨버터블 던(Dawn)을 시승했다. 롤스로이스 홍보팀이 영국 본사에서 1만km쯤 떨어진 이곳까지 각국 기자들을 초청한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어서였다. 입이 떡 벌어지게 아름다운 드라이브 코스는 물론, 롤스로이스 던의 제트족 고객들이 즐겨 찾을 법한 휴양시설이 도처에 있었다. 시승행사 거점은 딜레어 그라프 에스테이트. 영국 다이아몬드 브랜드인 그라프의 회장 로렌스 그라프 소유의 럭셔리 리조트로, 남아공의 대표적 와인 산지인 케이프 와인랜즈의 산과 와인농장들 사이에 위치했다. 오후 늦게 도착해 여장을 푸는 사이 해는 기울었고, 멀리 숙소를 무대배경처럼 둘러싼 산들과 ‘심쿵’하게 어우러지는 노을이 깔렸다.
하늘을 날 순 없지만 다 가진 기분을 줄 수 있다
제품 소개를 듣기 위해 언덕 위 헬기 이착륙장에 마련된 무대쪽으로 이동해 이번 여정의 주인공, 던을 만났다. 무대에 올려진 것은 미드나이트 사파이어 보디에 만다린색 인테리어를 갖춘 차였다. 흔히 던을 롤스로이스 레이스의 컨버터블(드롭헤드) 버전이라고 설명하지만, 직접 본 던은 일전에 시승했던 레이스와는 이미지가 많이 달랐다. 얼굴부터 시작해서 차체 패널 80%가 바뀌었으니 그럴 수 밖에. 지붕을 올린 던의 실루엣은 레이스와 전혀 다르다. 각 차가 지향하는 특성이 다른 만큼 애초에 디자인을 다르게 시작했다고 제품담당자는 설명했다. 레이스는 스포티한 주행을 즐기는, 혼자만의 시간을 중시하는 고객을 위한 GT이고 던은 다른 이들과 함께 느긋한 라이프스타일을 즐기기 위한 차라는 것이다. 특히 던에는 소셜 스페이스, 즉 사교적 공간으로서의 역할이 요구됐고, 이를 위해 완벽한 4인승 컨버터블로 탄생했다. 다른 메이커들이 내놓고 있는 2+2 구성의 컨버터블이 롤스로이스에겐 통용되지 않았다.
안타깝지만 일몰 후의 바람이 너무 차가워 던의 심미성을 충분히 감상할 수 있을 만큼 그곳에 오래 머무를 수는 없었다. 낮 기온이 27도까지 올라간다는 예보를 봤건만, 바람 부는 저녁에는 봄 재킷이 얇게만 느껴졌다.
이튿날 단단히 챙겨입고 날이 밝기 전부터 차를 구경하러 나갔다. 새벽에 ‘새벽’(Dawn)을 보기 위해서다. 어둠이 걷혀가는 새벽빛에 만난 던은 아름다움을 넘어 신비로운 분위기마저 풍겼다. 특히, 헤드램프 모서리에서 시작된 코치라인을 따라 시선을 옮기다 보면 일직선처럼 이어지던 라인이 뒷바퀴 위쪽에서 봉긋 올랐다가 테일램프를 향해 살짝 내려가는데, 이 부분이 압권이다. 지붕을 내리는 던을 훔쳐보다 이 어깨선이 눈에 들어오면 섹시하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던의 외관이 주는 놀라움 중 한가지는 지붕을 내렸을 때는 물론이고 올렸을 때도 매혹적인 선과 양감을 뽐낸다는 것이다. 지붕을 닫았을 때도 이렇게 완벽하게 조화로운 컨버터블은 별로 없다. 특히 던처럼 지붕을 올린 모습이 쿠페(레이스)보다도 멋들어진 컨버터블은 더더욱 찾아보기 힘들다. 마치 지붕 개폐에 따라 서로 다른 두대의 차를 오가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전날 저녁 관계자들은 던의 지붕을 닫아둔 채 제품설명을 이어갔다. 그러다 얼마 후 디자이너가 나와 외관 디자인을 설명하는 중간에 리모컨으로 지붕을 내렸다. 두가지 차를 한대에 성공적으로 담아냈음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시승에 앞서 제각기 다른 색상과 장비를 갖춘 8대의 던이 주차장에 도열해 있는 모습은 말 그대로 장관이었다. 하늘색(터키석 색상) 차가 가장 눈길을 끌었지만 지붕색과 내장의 조화까지 따지면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보디 색상은 얌전해도 내장재는 화려하거나, 지붕을 올리면 또 다른 분위기로 변신하는 식이다. 특별주문 외에 지붕의 기본색상은 6종이고 실내 천장은 3가지 색상을 고를 수 있다.
지붕과 보디가 맞물리는 부분에는 두툼한 스테인리스 스틸 장식을 둘러 극적인 변화를 강조했다. 지붕을 내렸을 때 커버 역할을 하는 데크부분은 말굽형태로 뒷좌석을 둘러싸는 나무장식(캐나들)으로 덮었다. 아울러 뒷좌석 중앙에는 폭포처럼 흘러내리는 나무장식을 놓아 외관과 실내에 연결감을 준다. V자 결을 지닌 이 ‘워터폴’ 나무장식은 따로 떼어서 전시해도 그럴싸했다(정말로 숙소인 딜레어 그라프의 소장품 중 하나인 것처럼 로비에 전시됐다). 앞쪽이 넓게 벌어지는 코치도어를 연 다음 신발을 벗고 타야 할 것만 같은 양털 매트 위로 - 눈을 질끈 감고 - 오르고 나면 레이스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 실내가 눈에 들어온다. 창턱의 버튼을 눌러 코치도어를 닫고 시동버튼을 누르면 꾸르릉, V12가 깨어난다.
시승은 우선 스텔렌보쉬에서 서쪽의 케이프타운까지 가는 코스에서 시작됐다. 곧장 가면 1시간이면 충분하지만 동쪽 산악지형에 있는 구불길과 고속도로를 모두 경험할 수 있도록 4시간에 걸쳐 돌아서 갔다. 케이프타운을 출발해 해안도로를 따라 이어지는 나머지 코스까지 지도상에 그리면 무한대 기호(∞) 같은 모양이 된다.
이번 행사의 후보지 중 한 곳이었던 오스트레일리아처럼 남아프리카공화국도 자동차가 좌측통행한다. 다행히 시승차로는 운전석이 왼쪽에 있는 LHD와 그 반대인 RHD 모델이 모두 준비됐다. 좌측통행 도로에서 LHD 차를 운전하는 게 우리나라에서 RHD를 운전하는 것보단 덜 어색한 듯했지만 교차로에선 종종 머리가 멍해지기도 했다. 경유지가 미리 입력된 내비게이션, 그리고 길안내를 전방시야에 띄워주는 헤드업 디스플레이가 있어서 그나마 신경을 곤두세울 일이 적었다. 이따금 어댑티브 크루즈 컨트롤을 사용하는 여유도 부릴 수 있었다. 클래식한 이미지로 인해 트렌디한 첨단기술 적용에 초연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롤스로이스도 BMW그룹 소속인 만큼 어지간한 기능은 다 갖추고 있다. 차로이탈 경고 기능이나, 전후좌우 상황을 보여주는 카메라, 야간에 사람과 동물을 식별해내는 열감지 경고 시스템 등등.
이런 장비가 아니더라도 운전은 쉽고 부담 없게 느껴진다. BMW 7시리즈 롱휠베이스보다 큰 컨버터블이지만 말이다. 던은 고스트보다 뒷바퀴 윤거가 24mm 크고, 타이어도 뒤쪽이 앞쪽보다 30mm 넓다(앞 255/40 R21, 뒤 285/35 R21). 휠베이스는 고스트보다 18cm 짧다. 무게중심도 더 낮다. 여기까지는 레이스와 같다. 하지만 레이스보다 200kg이 더 나간다. 200kg이나? 제품담당자는 이를 자랑스러워했다. 코치도어를 채택한 B필러 부근의 강성이 워낙 높아서 차체 보강으로 인한 무게증가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200kg 중 소프트톱과 관련된 부분이 85kg이다). 그 결과 공차중량은 2.56톤이다. 그리고 이를 V12 6.6L 트윈터보 엔진으로 움직인다.
롤스로이스 중 최강인 레이스의 632마력보다 약한 570마력이지만 1,500rpm부터 발휘되는 79.5kg·m의 최대토크는 발끝의 미동만으로 아무런 스트레스 없이 거구를 움직인다. 따라서 스티어링 휠 너머에 달린 멜론바 같은 변속 레버에는 로(LOW) 모드가 있을 뿐, 스포츠 모드나 방정맞은 수동변속을 위한 시프트 패들 따위가 없다. ZF 8단 자동변속기는 일반적인 주행정보 외에 GPS와 내비게이션의 지형정보를 이용해 적절한 기어를 선택한다. 차의 성격을 잘못 이해한 성질 급한 운전자가 아니라면 엔진 힘이나 기어변속에 신경쓸 일이 없다. 밟으면 밟는 만큼 나갈 뿐 아니라, 굽이굽이 이어지는 산길도 주저하지 않고 빠르게 달려나간다.
작정하고 몰아붙이면 기울어지고 쏠리지만 에어 스프링과 액티브 롤바, 던에 맞게 새로 개발된 타이어가 기를 쓰고 버티면서 세상은 평화롭다고 믿게 만드는 주문을 건다. 호리호리한 스티어링 휠을 슬슬 휘감아 돌리면서 앞유리 너머 각진 차체가 좌로 우로 휘어진 굽잇길을 따라 능수능란하게 머리를 들이미는 걸 보고 있으면 조금은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 몽롱함이 찾아든다. 이국적인 자연환경과 롤스로이스의 비단결 같은 주행에 취해버리기 십상이다.
0→100km/h 가속 5.0초의 스포츠카 뺨치는 순발력을 자랑하는 이 덩치 큰 포식자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사냥감을 덮칠 수 있다. 그것도 V12의 존재를 희미하게 알리는 음흉한 신음소리와 함께. 하지만 파워리저브 미터를 10% 아래로 떨어뜨리며 200km/h 속도로 내달리는 것은 지붕을 연 롤스로이스에 어울리지 않는다. 두어번 가속페달을 끝까지 밟아 잠재력을 확인하고 나니 그런 주행에는 흥미가 없어졌다. 250km/h로 설정된 제한속도가 전혀 아쉽지 않다. 물론 롤스로이스로 산길을 신나게, 그것도 지붕을 열고 달린 것은 굉장한 경험이었지만, 속도를 낮추었을 때 이 차의 진가는 더욱 빛났다. 그리고 그것은 시승 후반부 해안도로를 달리면서 더욱 확실해졌다.
그 사이 중간 휴식지였던 워터크루프 와인에스테이트부터 케이프타운의 테이블마운틴 국립공원까지는 - 마사지 기능이 있는 앞좌석을 떠나기가 아쉽긴 했지만 - 일부러 뒷좌석에 앉아 이동해봤다. 차체 크기가 있으니 당연하겠지만 뒷좌석 공간은 성인이 앉기에 충분히 널찍하며, 기다란 코치 도어 덕분에 타고내리기도 쉽다. 지붕을 내렸을 때는 서서 움직일 수 있으니 말할 것도 없고, 지붕을 덮었을 때도 레이스보다 무난하게 뒷좌석으로 드나들 수 있다. 지붕을 여닫을 땐 안감이 접히면서 앉은 키가 큰 필자의 머리를 건드리기도 했지만 덮고 나면 머리공간이 레이스보다 여유롭다.
뒷좌석용 송풍구와 온도조절 장치, 시트 열선, 수납공간 등은 레이스와 같다. 뒷좌석 안전벨트는 C필러 밑동에 달린 레이스와 달리 시트에 내장되어 있다. 앉은 자세는 편안하다. 운전자가 기다렸다는 듯 음악을 틀었다. ‘꺼주었으면’ 싶은 불쾌한 울림 대신 롤스로이스 비스포크 오디오를 통해 청명한 사운드가 흘러나왔다. 바람을 가르는 요트 위에서 오붓한 파티를 즐기고 있는 듯한 기분에 젖어들었다. 속도가 올라가면 어쩔 수 없이 바람이 몰아치니 뒷자리가 상석이라곤 못하겠지만 얻어 탄 느낌이 들지 않는 게 여느 고급 컨버터블 뒷자리와 다르다. 특히 지붕을 올렸을 때의 분위기나 승차감은 롤스로이스의 뒷자리 느낌으로 손색이 없다.
던의 소프트톱은 50km/h 이하의 속도에서 열거나 닫을 수 있다. 개폐시간은 22초인데, 시간이 문제가 아니라 작동음이 없다는 게 중요하다. 차를 세워놓고 들어도 ‘우웅 철커덕’ 하는 따위의 분위기 깨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모터 소음을 줄인 것은 물론이고 구성품끼리 부대껴 나는 잡소리를 없애기 위해 여유공간을 확보하는 등 세심하게 신경 쓴 결과다. 롤스로이스는 이를 ‘소리 없는 발레’라고 자랑스레 소개하고 있다.
던의 소프트톱은 현존하는 컨버터블 차 중 두번째로 사이즈가 크다(첫번째는 팬텀 드롭헤드 쿠페의 것이다). 6겹으로 된 소프트톱은 바깥쪽이 매끈한 것은 기본이고, 천장에 해당하는 안쪽도 박음질에 신경을 썼다. 부위별로 팽팽하게 당겨진 천장은 쿠페의 그것처럼 단단해 보인다. 고속주행 중의 밀폐감은 던이 컨버터블인 것을 완전히 잊게 만든다. 아닌게 아니라 소프트톱을 닫았을 때 던의 정숙성은 레이스와 같은 수준이다. 세계에서 가장 조용한 컨버터블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스타일 망가지는 접이식 하드톱을 채택할 필요가 없었던 이유 중 하나다.
후트베이의 절벽 아래 바닷가에서 점심식사를 마치자 시승은 채프만스 피크 드라이브의 유료통행 구간으로 접어들었다. 아슬아슬한 굽잇길을 따라 왼쪽엔 절벽, 오른쪽엔 낭떠러지 너머로 바다가 보이는 절경이 이어졌다. 드라이빙 게임에서 봤을 법한 풍경 속을 달리고 있었다. 지붕 열린 롤스로이스를 타고 대서양의 바람을 느끼면서. 이어 희망봉 동쪽 폴스베이를 오른쪽에 끼고 달리고 있자니 던의 가느다란 스티어링 휠이 럭셔리 요트의 방향타처럼 느껴졌다. 어느 곳에 가든 던은 잘 어울렸고,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줬다. 폴스베이 동쪽, 루이엘스의 저녁식사 장소 역시 파도가 치는 바닷가였다. 왼쪽에선 노을이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오른쪽에선 산 너머로 달이 떠올랐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처럼 가까이서, 마치 LED 조명을 켜놓은 듯 맑게 빛나는 달을 보고 있자니, 서울의 탁한 공기와 별 볼일 없는 일상이 떠올랐다(아니나 다를까 귀국하던 날 미세먼지 주의보를 접했다).
다시 숙소까지 이동하는 길엔 전문기사가 운전하는 던의 뒷자리에 앉았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었지만) 관계자가 ‘레이서’라고 소개했던 운전석의 기사는 정말 운전을 잘했다. 운전하는 짬짬이 승객들과 부드러운 담소를 이어갔지만, 그의 시선이 고정된 앞창 너머를 보니 구불구불한 길들이 일자로 펴지면서 마치 워프를 하고 있는 듯했다. 시선을 내려 속도계를 확인하기가 겁났다. 지붕을 닫은 던은 그 와중에도 롤스로이스의 뒷자리에 앉아 편히 가는 승차감을 그대로 제공하고 있었다. 이대로 서울로 돌아가도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다음날 아침, 비가 올 것처럼 촉촉한 날씨 속에 주변 공기는 더욱 상쾌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상쾌함은 신형 던에 영감을 제공한 1952년형 롤스로이스 실버 던에 동승해 숙소 주변 도로를 달리는 내내 이어졌다. 오랫동안 잊지 못할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 실버 던을 타고 나니 그 혈통을 이어받은 신형 던의 가치는 훨씬 높게 느껴졌다. 세계 최고의 컨버터블, 혹은 ‘세계 유일의 진정한 현대적 4인승 수퍼 럭셔리 드롭헤드’라는 롤스로이스의 자부심에 누구도 토를 달 것 같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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