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번의 기술혁신, BMW 7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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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시리즈는 BMW 서열 꼭대기에 있는 최고급 모델, 즉 브랜드를 대표하는 플래그십이다. 플래그십은 당대 최고의 자동차 기술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흥미로운 대상이다. 이 세그먼트에서 최강자는 메르세데스-벤츠 S클래스.
7시리즈와 S클래스는 지난 수십 년간 선의의 경쟁을 펼치면서 서로의 장점을 흡수하며 발전했다. 7시리즈는 첨단 기술과 운전의 재미를 내세워 승부해왔다. 잠깐 15년 전을 떠올려보자.
크리스 뱅글 체제에서 나온 4세대 7시리즈(E65)가 너무 못생겼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그런데 간과해선 안 되는 부분이 있다. 못생긴 외모 탓에 저평가되곤 하지만, 사실 E65는 자동차의 기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혁신적인 모델이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예가 E65를 통해 첫선을 보인 iDrive.
처음 나온 iDrive는 지금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초대 iDrive는 다이얼이 하나 덩그러니 있을 뿐, 메뉴 버튼 하나 없었다. 그래서 무얼 하나 하려면, 다이얼을 밀고 당기고 돌려가며 메뉴에 들어가고 나가고를 반복해야 했다. 이후 개선에 개선을 거쳐 지금의 형태에 이르고 있다. iDrive는 자동차의 인테리어 디자인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았고, 지금은 사실상 모든 자동차 메이커가 iDrive와 닮은 시스템을 채택하고 있다.
BMW에서 가장 처음 전자식 키와 시동 버튼을 채택한 것도 E65였고, 수평적 레이아웃과 대시보드 상단의 대형 와이드 스크린으로 요약되는 BMW 특유의 실내 레이아웃도 E65가 정립한 것이다. E65는 비록 못생긴 차였지만, 비전을 제시하고 영감을 준 기념비적인 자동차였다는 점에서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신형 730Ld xDrive의 키를 건네받았는데, 리모컨 키라기보다 스마트폰에 가까운 모습이다. '디스플레이 키'라는 이름의 이 새로운 키는 사실 i8과 함께 선보인 것이지만, 국내에는 신형 7시리즈를 통해 처음 소개됐다. 디스플레이 키는 그 이름처럼 320×240 해상도의 2.2인치 터치스크린이 달렸다.
이것을 리모컨 삼아 차에서 내려 원격 주차도 할 수 있다고 한다. 18년 전 영화 〈007 네버다이〉에서 피어스 브로스넌이 750iL 뒷자리에 누워 휴대전화로 운전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아직 제임스 본드 기분을 낼 수 없다. 국내 시판 모델에는 리모트 컨트롤 파킹(RCP)이라는 원격 제어 주차 기능이 빠졌기 때문이다.
BMW 관계자에 따르면, 내년 상반기에는 국내 사양에도 RCP가 적용될 것이라고. RCP는 선택품목이어서 가격이 지금보다 오를 가능성이 있는데, 독일 기준 550유로(약 70만원)로 많이 비싸지는 않기 때문에 변동이 없을 수도 있겠다.
디스플레이 키에는 RCP 외에도 할 수 있는 게 많다. 침대에 누워 차량 상태나 정기점검 스케줄을 확인하거나, 내일 출근시간에 맞춰 냉·난방 장치의 가동 시간을 예약 설정해놓을 수도 있다. 한파가 몰아치거나 밤새 눈이 잔뜩 쌓였어도 걱정 없다. 집에서 디스플레이 키로 미리 히터와 앞뒤 유리 열선을 겨두면 그만이다.
디스플레이 키는 레스토랑이나 카페에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기엔 근사한 아이템이지만, 크고 무거워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기가 영 부담스럽다. 스마트폰과 차 키로 양쪽 바지주머니가 부풀어 올라 축 늘어진 모습은 7시리즈 오너의 품격에 어울리지 않는다. 아, 그리고 키 가격이 유럽 기준 700유로(약 88만원)라고 하니, 간수를 잘하는 것이 좋겠다.
겉모습은 이전 세대의 스타일링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모습이다. 지난해 선보인 '비전 퓨처 럭셔리' 콘셉트 카의 요소가 언뜻 보이기도 하지만, 악몽 같았던 4세대 때의 경험 때문이었을까? 모험을 하지 않았다. 신기술을 대거 투입한 만큼 스타일링에서도 혁신을 보여줬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도 공기저항계수가 겨우 0.24라니, 대형 세단으로서 실로 놀라운 성과가 아닐 수 없다.
문을 열면 플래그십다운 여유롭고 호화로운 전경이 펼쳐진다. 외장 디자인과 마찬가지로 익숙한 모습이다. 첫인상은 다른 BMW 모델과 차별되는 7시리즈만의 특별함이 조금 부족하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살펴보면 볼수록 지금까지 BMW에서 보지 못했던 것들이 하나 둘씩 보이기 시작한다.
가장 먼저 은색 금속 재질로 번쩍이는 스위치류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것만으로도 실내는 굉장히 화려한 분위기. 그동안 독일 프리미엄 3사 가운데 가장 무뚝뚝한 버튼 디자인을 보여준 BMW로서는 엄청난 변화다. S클래스의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시동 버튼이나 주행 모드 버튼처럼 작은 부품부터, 기어 레버, iDrive 컨트롤러, 스티어링 휠까지 모두 새로운 디자인이다. 터치 방식의 공조장치와 풍구도 새로운 것. 또한, BMW 최초로 터치스크린을 단 것도 주목할 부분이다. 더불어 메뉴 화면도 아이콘 식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오랫동안 iDrive에 익숙해진 탓인지 큰 효과는 느껴지지 않는다. 여기에 세계 최초로 '제스처 컨트롤'이라고 하는 동작 인식 기능도 추가했다.
이로써 신형 7시리즈는 네 가지 인터페이스를 갖추게 됐다. 5세대로 진화한 iDrive와 함께, 터치스크린, 제스처 컨트롤, 그리고 음성 제어 시스템이 있다. 제스처 컨트롤은 신기하긴 했지만, 동작이 한정되어 있고 인식률도 완벽하지 않아서 기대에 다소 못 미쳤다.
대신 음성 제어 시스템의 완성도가 높다. 오디오나 전화는 이제 입으로만 충분히 조작할 수 있다. 칠첩반상으로 차려진 인터페이스는 따로 따로 놓고 보면 조금씩 부족하지만, 이것들이 한데 모였을 때는 서로 상호보완하며 완벽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
실내 소재와 마무리, 조립 품질은 전반적으로 우수하지만 실망스런 부분도 더러 있다. 스티어링 휠을 잡으면 뒷면에 커다란 구멍이 만져지는데, 손가락을 넣어보면 나사가 있다. 요즘은 대중차에서도 보기 힘든 모습이다. 아마도 시프트패들이 체결되는 부분인 것 같은데, 반드시 개선이 필요한 부분이다.
그리고 창문을 에워싼 안쪽 플라스틱 트림은 사출 자국이 있는 등 끝마무리가 영 좋지 않다. 헤드업 디스플레이와 계기판에 나오는 차 그림이 5시리즈인 점도 아쉽다. 7시리즈 정도의 차는 이보다 세심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
7시리즈는 전통적으로 플래그십다운 쾌적성과 함께 운전의 즐거움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왔다. 승차감보다 민첩성을 중시해온 BMW지만, 신형 7시리즈의 운전대를 잡고 몰아보면 이전보다 최고급 대형 세단다운 안락성 쪽으로 무게중심이 기울었다고 느껴진다.
승차감은 공중에 매달려 있는 감각에 가까워졌는데, 그렇다고 붕 떠 있는 느낌은 아니고 평형을 유지하면서 네 바퀴를 지면에 꾹 눌러주는 감각이다. 문자 그대로 미끄러지듯 달리는 느낌. 승차감이 차분하고 고급스럽다. 그래도 동급에선 여전히 가장 탄탄한 편이다.
주행 모드에도 변화가 있다. 기본적으로 에코 프로, 컴포트, 스포츠로 구성된 것은 다른 BMW 모델과 같지만, 신형 7시리즈는 여기에 컴포트 플러스와 어댑티브 모드를 새로 추가됐다. 컴포트 플러스 모드에서는 이전 세대보다 훨씬 부드러워진다. 서스펜션이 웬만한 충격은 모두 집어삼키기 때문에 수면 위를 유유히 항해하고 있는 듯한 좋은 기분에 무심코 웃는 얼굴이 된다.
어댑티브 버튼을 눌러두면 운전자의 운전 스타일과 주행 데이터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최적의 세팅을 제공한다고 한다. 시승 기간이 짧았던 관계로 충분한 데이터가 모이지 않았는지 효과를 실감할 수는 없었지만, 차를 소유하면서 데이터가 쌓이면 쌓일수록 운전자의 의도에 가까워지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스티어링은 대형 세단치고는 유격이 거의 느껴지지 않고 타이트하다. 스티어링 휠의 총 회전수(록투록)도 2.3회전으로 덩치에 비해 적다. 대형 세단도 BMW는 BMW라는 자기주장이 전해진다. 스티어링은 빠르고 정확하지만, 속도나 주행모드에 따라 스티어링 무게가 늘어나는 느낌이 과하고 부자연스럽다.
몸집에 비해 몸놀림이 가벼운 느낌인데, 2톤 남짓으로 결코 가벼운 무게는 아니다. 그래도 라이벌인 A8 L 50 TDI 콰트로보다 95kg 가볍고, S 350d 4매틱 롱보다는 자그마치 175kg이나 가볍다. 스틸, 알루미늄, 마그네슘, 카본파이버가 혼합된 혁신적인 복합 소재 차체 덕분이다. 차체를 보강하느라 부득이하게 무거워질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은 기술력 부족을 시인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발걸음이 가볍게 느껴지는 이유는 경량 차체에도 있지만, 저회전부터 두툼한 토크를 내는 엔진 덕분이기도 하다. 엔진은 익숙한 직렬 6기통 3.0L 터보디젤이지만, 최고출력 265마력, 최대토크 63.3kg.m으로 이전보다 각각 7마력, 6.2kg.m이 올랐다. 변속기는 자동 8단.
가속페달을 바닥에 붙이면 엔진은 즉시 힘을 준다. V8 휘발유 엔진급의 강력한 토크 덕분에 담담하고 느긋하게 속도를 올려나간다. 최고속도는 6단에서 나오는데, 최고속도를 유지하며 8단으로 올려보면 엔진회전수가 겨우 3,000rpm을 약간 웃돌고 있을 정도로 엔진에는 여유가 넘친다.
사실상 힘의 부족을 느낄 일이 전혀 없고, 사운드도 디젤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만큼 훌륭하다. 파워 전달의 느낌이 동급 디젤 엔진 중에서 단연 으뜸이다. 실내는 정숙하지만, 노면 소음이 조금 많이 올라오는 편이다.
변속을 차에 완전히 맡기면, 엔진이 시끄러워지기 전에 고속 기어로 착착 바꿔나간다. 매끄러운 작동감이다. 정부 공인 복합연비는 12.2km/L. 몰아붙여도 여간해선 9km/L 아래로 내려가지 않고, 정속주행 때는 18km/L도 너끈히 나온다.
액티브 크루즈 컨트롤과 차선 유지 기능을 켜두면, 거의 반 자율주행이 가능하다. 레이더와 스테레오 카메라로 주변 상황을 파악하면서 차선을 이탈하지 않도록 스스로 스티어링 휠을 조절하는 한편, 완전 정지와 재출발도 스스로 해낸다. 앞으로 끼어드는 차에 대한 반응은 약간 느리지만, 가·감속이 매우 자연스럽고, 야간에도 차선 인식률이 좋아서 신뢰도가 높다.
약 400km의 시승을 마쳤을 때, 트립 컴퓨터는 최종적으로 10.2km/L를 표시했다. 공인연비에는 못 미쳤지만, 차의 크기와 무게, 동력 성능, 주행 조건 등을 감안하면 놀라운 수준이다. 파워트레인, 골격, 섀시, 첨단 기술, 여기에 경제성까지 사지 말아야 할 이유를 설명하기가 어려운 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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